'한기총 대구교회 보고서'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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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치현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6-14 23:25 조회1,1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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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대구교회 보고서에 대한 답변

 

 

 

기독교는 복음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때문에 교회사 초기부터 이단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개신교는 많은 교단으로 분열되고 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을 가지다 보니 이단 논쟁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한국 교회의 주류인 장로교단은 미국의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에 영향을 받아 외국이나 타 교파에 비해 이단시비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수의 평신도들이나 일반인들은 이단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반사회적 비윤리적 사이비 집단으로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짧은 역사 속에서 그런 부류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집단에 대해서는 단죄함이 마땅하고, 교회가 나서지 않더라도 사회에서도 단죄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교리적 차이나 성경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반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집단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기독교의 다양성의 차원에서 신학적 논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때로는 교파가 없고 주류에 속하지 않은 작은 집단의 경우 교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의심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도 베드로에게도 어느 교파에 속한 분이 아니며, 어느 교파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고전1:12,13)

 

이단으로 단죄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한번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경우,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보려 하지 않고 마음을 닫고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단 낙인 때문에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많은 불이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이단을 판단한 단체는 혹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하더라도 단체의 공신력 때문에 번복하는 일은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단 정죄는 참으로 신중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말리엘은 사도들이 유대 공회 앞에서 정죄 받을 때,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였습니다(5:38,39).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라면 그냥 두어도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것을 정죄하는 것이라면, 교회를 위한다는 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다음은 한기총의 연구 발표 내용요약이다.(17회 총회 보고서, 2006, pp.193~195).

 

1. 이현래는 누구인가? 

이현래는 현재 대구의 대구교회외에 국내에 22개 지부와 미국, 독일, 캐나다 등 해외에 7개 지부를 갖고 있으며 약 2천여 명의 교인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 신문 <교회와 신앙> 20051110일자 하나님의 전능성 부인 등 황당의 극치’(cf.[현대종교}에서 2004년도)에 파악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국내에는 28개 교회, 해외에는 24개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8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2년간 모 선교단체에서 일한 후 자신을 추종하는 신자 30여 명과 함께 1977년에 현재의 대구교회를 시작했다.

이현래는 1974년에 우연히 워치만 니의 <주의 형상을 닮아>라는 책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고, 이후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책을 거의 탐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간 [현대종교] 200411월호, pp.29-30. ‘대구교회(이현래)는 지방교회 아류’)

 

  

2. 이현래의 가르침과 주장의 문제점

연구조사에서 이현래의 가르침과 주장이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인 것이 드러났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현래는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부정하는 자로서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현래는 우리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다고 배웠는데, 무소부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성경적 개념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생각이예요”(이현래, 2004526일 뉴욕집회, 최종완성01-서론)라고 한다.

 

 

뉴욕집회에서 말한 최종 완성의 서론에서 말하려는 것은 예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입니다. 무소부재를 부정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곳이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구약에 이스라엘이 꼭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무소부재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어는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범신론이나 만물에 내재해 있는 신의 보편성을 말할 때 무소부재의 개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습니다. 만물에 내재해 있는 보편적 신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 구약에 성전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죄목 중 하나가 성전이 아닌 산당을 지어 아무데서나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로 가서도 이방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갈지라도 바다 끝까지 갈지라도 거기도 계신다는 시편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꼭 예수 안에서 계시 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시고, 그리고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며 장차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다는 것이 최종 완성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는 곳이 정해져 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셨다……. 이 계시는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후 이제는 예수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우리 입장이다…….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듯이 우리는 예수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공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나 이방인들이 믿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분, 예수 안에서 아버지가 되신 분을 믿는다.(이현래, 최종 완성, 2014, pp. 22-23)

 

이현래 목사님의 40년 사역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만나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최종완성에서 이현래 목사님은 그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현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사건이 부활이라고 한다.(이현래, 2004530일 뉴욕집회, 최종완성05-내 아버지 집)

 

 

'최종 완성: 5 내 아버지 집'은 요한복음 141-11절 말씀을 설교한 내용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하면서, 위에 인용한 죽으심은 아버지께로 가심이며, 부활은 우리에게 오심이다.” 라는 말씀을 했습니다(최종완성, p. 121).

 

내용 어디에도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육신으로 세상에 오시고, 인생으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분은 번식하셨다.” 라고 했습니다(최종완성, p. 117). 번식이란 표현은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생명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들로 번식한다는 것입니다. ‘와서 우리를 영접하신다.’ 한 것은 주님의 부활의 세계 안으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이 우리에게 오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의 다른 저서에서 부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열린 무덤을 보았고, 도마는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흔적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생선을 구워 먹고 부활하신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전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본 것은 아니지만 부활의 영원한 실재를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하신 그 부활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증거 안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온 인류가 참여할 수 있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듯 예수의 부활을 그렇게 증거 하지 않고, 우리가 경험하고 맛볼 수 있는 부활을 전해 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소원은 자신이 지나간 역사책 속에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 보존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과정에서 다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의 희망이며 주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돌리게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이현래,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2016, pp. 89-92).

 

위에 기록된 것에서 보듯이, 이현래 목사님은 예수의 역사적 부활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설교의 많은 부분이 예수의 부활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 하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현래는 예수님의 재림은 공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사람 속으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이씨는 예수님이 공중으로 오시는 게 아니에요. 공중에 오시면 뭐하시겠습니까? 아무 소용 없잖아요. 사람의 속으로 와야 진짜로 오는 것이죠. 속으로 와서 영원토록 거해야 진짜로 오시는 거죠라고 하고 사람이 공중으로 떠올라간다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더구나 이 문명의 세계에서, 최첨단의 과학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너무 맹신이다. 기적을 믿는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다.”(이현래, 2004526일 뉴욕집회, 최종완선01-서론)라고 하였다.

 

 

이현래 목사님은 축자영감이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목사님은 재림을 긍정하십니다. 설교 말씀에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끝내기를 즐겨 하십니다. 위에 인용된 내용은 재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며 실제로 삶 속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허황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92년도 휴거 해프닝을 언급하면서 재림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의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최종 완성'에서도 그런 맥락에서 요한계시록은 영 안에서 본 것이다. 그는 영 안에서 본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이나 숫자를 통해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물질적인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 경륜의 최종적인 완성이라는 것을 꼭 붙잡아야 한다.” 하였습니다(최종완성, p. 18).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재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모양으로 기다리는가 하는 문제는 믿는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재림의 소망을 예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그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는 것으로 소망합니다. 그것이 공중으로 떠올라 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실질적인 기다림이며, 합리적으로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사님의 다른 저서에 재림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역사의 최종적 완성을 기다립니다.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미래의 한 날을 정해 놓고 하늘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4:15).

우리는 분명 교회 안에서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고 누림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는 또한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게 됩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지만 이미 얻었다 함도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3:12). 그도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파루시아(재림)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기다림의 정점이며 예수의 길의 완성인 것입니다.(이현래,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2016, p. 100).

 

이 목사님은 재림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며 항상 현재적 준비를 강조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예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하며 맛볼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오해하여 생긴 것입니다.

  

 

이현래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으시고, 자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형상이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며,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그것이 부족이고 모자라는 것이라고 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전능성도 부정되고 내적형상과 외적형상을 혼돈하는 무지를 보이고 있다.

이씨는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다. 이렇게 개념상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족하신 게 있어요. 절대적인 부족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형상이 없다는 거죠”(이현래, 2002423, 제주교회, 시작에 관한 계시-사람을 지으신 목적)라고 하고, “영이시기 때문에 실재는 돼지만 형상이 없다, 그러니까 형상이 없는 분의 절대적 갈망은 뭔가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죠”(이현래, 2002423, 제주교회, 시작에 관한 계시-사람을 지으신 목적)라고 하였고, “하나님도 모자란 것이 있다. 형상이 없다는 거예요. 형상이 그래서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이현래, 2002423, 제주교회, 시작에 관한 계시-사람을 지으신 목적)고 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씨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 분이 전지전능하고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게 부름 받을 이유가 없고, 오늘 이 땅위에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이현래, 2005225, 하나님 경륜의 중심-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심)라고 하였다.

 

 

우선 모든 말과 글은 전달하려는 의도를 알아야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장도 전후 맥락을 떠나면 본래의 의도와 달리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글 하나님은 형상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필요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말씀하려는 요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심히 좋다 하였고, 창세기 2장에 창조를 마치고 그날에 안식하셨다고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적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절대적 필요와 갈망 안에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볼 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인간이 볼 때 인간이 왜 저런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는 말씀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보다 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말씀은 없다.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현래, 시작에 관한 계시-2장 사람을 지으신 목적, 2002)

 

하나님이 부족하신 것이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찾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하신 말씀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찾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찾으시는 것이 훨씬 크다고 믿는다면, 깊이 안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갈망을 가지고 있는 줄 알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설사 잘못했을지라도 그분에게 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시작에 관한 계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전능자가 아니면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가 없다.

전능자의 명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전능자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바로와 맞섰다.

전능자의 음성을 듣고 전능자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바로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로 나와 성막을 건축하였다.

전능자에 대한 믿음은 모든 인간에게 없으면 안 될 삶의 기초이다. 이 믿음 안에서 나로서는 불가능할지라도 전능하신 이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내가 안 될 때는 완전히 절망이다.

나의 객관적인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절망했더라면 나는 못 살았을 것이다. 마음의 계획이 사람에게 있을 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시라는 말씀이 내게 생생하다. 내 계획도 안 되었고 나아갈 길이 안 보였지만 그래도 무슨 일을 이루실 이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이현래, 주 하나님, 2016, pp15-16, 18-19)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수 없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이현래 목사님 자신도 절망에서 나올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우리를 찾으시며, 우리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랑의 고백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현래는 천당에 가려는 신앙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고 천당이 공간이란 개념은 휴지통에 날려버리라고 하며, 우리에게는 천당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씨는 천당에 가려고 열심히 하다가 천당에 가버렸으면 하나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 아마 좋은 곳일지도 모르죠, 편안하고, 행복하고, 좋은 곳일지도 모르죠. 모르지만 하나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동떨어진 곳이예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예요”(이현래, 2004530일 뉴욕집회, 최종완성05-내 아버지 집)라고 하고, “천당이라는 개념, 공간이라는 개념, 물질적인 개념, 이것을 휴지통에 완전히 날려버려야 하요. 그렇게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잔재가 남아 있으면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이현래, 2004530일 뉴욕집회, 최종완성05-내 아버지 집)라고 한다.

공간으로서의 천당에 가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이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고 하며 하나님은 새예루살렘이 필요한데 그 사람은 천당이 필요하니까, 그 사람들이 천당으로 다 가고 나면 새예루살렘에는 아무도 없을 것 아니겠어요?”(이현래, 2004530일 뉴욕집회, 최종완성05-내 아버지 집)라고 하고, “새예루살렘은 이러한 하나님의 내재적인 본질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이 사람 속으로 계속 흘러들어가서 변화를 일으켜요”(이현래, 2004526일 뉴욕집회, 최종완성01-서론)라고 한다.

 

 

우선 뉴욕집회에서 한 최종 완성이라는 주제의 말씀은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9-10)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소망이며 공생애 전 사역의 중심이기도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은 땅 위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물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지만, 예수님의 기도와 목표는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완성이라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이 교회이고, 완성된 모습의 계시가 요한계시록의 새예루살렘이라는 것이 최종 완성에서 말하려는 메시지입니다.

 

기독교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당을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17:3). 천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결과이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뀐다면 변질되는 것입니다. 제사보다 젯밥이 목표가 된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목표이기에 그것을 최종 완성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이고 이것을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서만 주로 '천국(the kingdom of heaven)' 이란 말을 썼지만 같은 뜻입니다. 천당은 성경에 없는 용어이고,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천당이라는 용어 때문에 평신도들에게 개념의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영생은 지금만도 아니고 죽음 이후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지금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였기 때문입니다(13:8).

 

천국은 나를 보존하는 곳이 아니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있는 나라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천국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 즉 그리스도를 추수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라는 개체가 보존되는 곳이 아니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요일5:12). 죽고 나서도 나를 찾아 보존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의 고백이며, 우리는 단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소망은 주님과 같이 되어 주님을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온전히 알리라.”(고전13:11) 하였고, 요한은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요일3:2)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소망은 내가 어떻게 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보듯 그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지금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그 날에도 예수 안에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죽어서 열조(조상)에게로 돌아갔다.’라고 표현하였고, 신약은 살든지 죽든지 예수와 함께가 소망입니다. 바울도 육신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소망하였습니다(고후5:8).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21:3), 이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의 소망은 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 보다 예수와 함께가 우리의 관심이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천국이고 영원히 사는 것임을 믿습니다.(이현래, 사람의 길, pp. 149-150)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두신 고귀한 목적은 나를 보존하는 천당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천당 가기 위한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신 말씀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현래는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가셨다는 말은 높여졌다는 말이지 구름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고 하며,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도 그분 자신의 질적인 확산과 양적인 확대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씨는 예수님이 구름타고 공중에 올라갔다는 것은 높아졌다 그 말입니다. 공중으로 올라가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여기서 둥둥떠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지금 간단한 예로 제가 여기서 둥둥 떠가지고 천장을 열고 하늘로 올라갔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을 지 생각해 보십시오”(이현래, 2004229,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강림과 두번 쨰 오심)라고 한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올라가셨다는 것을 그림처럼 그 현상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 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죠. 그 분은 영광중에서 올림을 받았어요”(이현래, 2004229,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강림과 두번 쨰 오심)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거리상으로 시간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죠. 그분 자신의 질적인 확산이고, 양적인 확대이죠. 그분 자신이 교회 안으로 확대되고, 확대되고, 확대되고, 교회 안으로 깊어지고 깊어지고, 깊어지고, 충만해지고 충만해지고, 그래서 온 인류 안으로, 모든 사람안으로 충만해질 떄 그분은 교회 안에 오시는 분이잖아요. 지금도 교회 안에 와 계시잖아요”(이현래, 2004229,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강림과 두번 쨰 오심-다시오심)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다시 오시는 것은 공중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룸 떼처럼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을 타고 오신다는 말예요”(이현래, 2004229,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강림과 두번 쨰 오심-다시오심)라고 한다.

 

 

앞서 말했지만 이현래 목사님은 축자영감이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 신앙은 아닙니다. 원래 그 말씀이 무슨 뜻이었으며,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을 내 삶에서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 후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것은 마가와 누가가 전한 복음에 기록되어 있고, 마태와 요한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4개의 복음서가 있고 열두 문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은 다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많은 상징들이 나옵니다. 어린양, 사자, 붉은 용, 사내아이, 짐승, 666, 음녀, 바벨론, 신부, 새예루살렘 같은 말들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물질적인 어떤 것이라 생각한다면, 말씀이 주는 참 뜻과 달리 다른 데로 빗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말씀은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말씀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영광 중에 오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말씀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풍성하게 경험될 때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 영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관하여 이현래 목사님은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2016)’에서 이렇게 섰습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승천 이야기로 마칠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서두에 다시 승천을 기록했습니다(1:9-11). 그리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1:4-5),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예수의 명령과 함께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1:11)는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승천을 통하여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시대라는 또 하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영광스럽게 되심으로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둘째 승천을 통해 인류가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3:21). 마지막으로 승천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태어나게 하는 경륜적 사건이었습니다.(이현래,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2016, pp. 96-97)

 

승천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구름을 타고 올라간 시공간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으며 존귀하게 되셨는가를 봐야 하며, 그가 보좌 우편까지 높이 올려 지셨다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현래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도 하나님의 마음을 얘기한 것으로서,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배필, 즉 아담이 필요했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성육신으로 비유한다.

이씨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갈망을 채울 배필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읽어드린 말씀 중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렇게 말했어요. 여기서 아담을 빙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죠”(이현래, 2004331,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다시 오심)라고 하며, ‘아담이 독처하는 게 좋지 못하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말로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기의 욕구를 채울 배필이 필요한 것이다. 그 배필은 형상으로서의 사람이죠. 자기 자신을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 마음을 형상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배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과 하나가 되고 한 육체, 한 덩어리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어요”(이현래, 2005225,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심)라고 한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것은 아담과 하와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을 얘기하면 자기가 나타날 수 없어요. 표현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얼마나 자기를 표현할 배필이 필요한가. 이것을 우리가 안다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해요. 나라는 인생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의 배필로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한 존재예요”(이현래, 2004526일 뉴욕 집회, 최종완선01-서론)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하와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예표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5:31-32).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도 음란한 아내 고멜을 통해 타락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물, 주인과 종,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아버지와 아들, 최종적으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됩니다. 각각의 관계에서 순종, 긍휼, 그리고 사랑 등 나타나는 가치가 다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신랑과 신부의 배필의 관계로 이해했을 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최종적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며, 주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키실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하나가 되고 한 육체, 한 덩어리가 되기를 갈망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2장의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하는 말씀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신 말씀과 같고, 바울이 말한 영으로 심비에 새긴 말씀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적인 측면에서 말씀을 풀이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변개할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 말씀이지만,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과 해석은 다양하고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어제와 오늘 우리에게 깨달아지는 것이 다르고, 어린아이 때와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 이해하는 정도가 다를 것입니다. 이해의 다름과 해석의 차이를 열어 놓을 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현래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영원성은 인정하지 않고 우리 속에들어오시는 것이 영원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하나님 되게 한 자, 하나님을 살려 낸 자, 이것이 산자라고 한다.(이현래, 2003112, 유다서-완전한 구원).

 

 

하나님의 객관적인 영원성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내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조개껍질에 담아 측량해 보려는 것과 같다.” 말한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 경험의 분량만큼 하나님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우리 속에서 경험되고 이해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객관적인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이현래 목사님 유다서 말씀 어디에도 하나님의 객관적인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대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목사님은 경험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늘 이런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이해보다 언제나 크십니다.”(이현래,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p. 59).

 

성경에서 살았다하는 말은 생물학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를 말합니다. 바울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6:11). 계시록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신 말씀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았으나 하나님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나타내는 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라는 것은 우리가 전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3. 연구결론

이현래(대구교회)는 예장통합과 예장고신 총회(1991)에서 각각 이단으로 규정된 윗트니스 리(지방교회, 회복교회)의 사상을 변형 발전시킨 자로서 윗트니스 리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이 씨의 가르침과 주장은 여러 면에서 이단성을 다양하게 나타내는데, 이는 윗트니스 리의 신인합일주의 사상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이단으로 규정하여 한국교회는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현래 목사님은 신인합일에 대해 전혀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대구교회 교인 어느 누구도 이 목사님이 신인합일을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인합일이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여 하심이라.”는 뜻이라면 그렇습니다. 이 말은 정통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한 말을 위트니스리가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은 누가 어떤 맥락에서 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전후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이 구절만으로 신인합일이라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현래 목사님은 이런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는 대구교회 홈페이지 인터넷 서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을 알려고 발버둥치던 젊은 날에 내 사유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것들이 겹쳐서 현실이 암담했을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바다처럼 엄몰해 오면서 나는 피조물일 뿐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나를 결정하고 규정해 줌으로써 나를 단순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의 바닥에는 항상 나는 피조물이다.’ 라는 고백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경작자와 밭, 씨와 흙, 아담과 그 배필인 하와 등은 모두 연합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성경 어디서도 인간의 위치를 포기하고 합일을 추구하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합일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이 지으신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연합의 길에서는 지으신 그대로, 인생 그대로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히려 더욱 여자이기에 남편의 사랑을 받고, 완전히 갈아엎어진 흙일수록 농부에게는 좋은 밭이듯이, 우리가 사람다울수록 하나님의 필요와 사랑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이현래,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2016, p. 132)

 

우주의 질서는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데서 삐뚤어 졌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은 거짓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같이 되려 했던 인간을 모두 원위치로 복귀시킨 것이다. 사람이 무슨 노력을 한다고 신이 되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 이 정해진 질서를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될 생각하지 말아라! 신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야 하듯이, 하나님과 사람은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별되어 있으면서 연합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현래, 히브리서: 새언약_아들로 말씀하심(4), 2016.09.04.)

 

그의 메시지 어디에도 인간의 위치를 포기하고 하나님과 합일에 이른다는 사상은 없으며, 그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사람의 위치, 사람의 길, 사람됨의 축복입니다. “왜 사람이 신이 되어야 하느냐?” “무엇이 부족해서 신이 되려는 것이냐?” “사람이면 족하지 않은가?” “나는 사람으로 지어진 것을 감사하고 사람으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나를 신이 될 수 없도록 지으셨음을 감사하고, 예수님이 나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구속해 주셨음을 감사한다.”고 하는 것이 이분 메시지의 중심인데, 이런 분을 보고 신인합일사상에 뿌리를 두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왜곡된 것입니다.

 

대구교회는 전국집회에 1000~13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국내 28개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많이 모이는 곳도 있지만 한두 가정 이현래 목사님 말씀을 좋아하는 곳 연락처를 포함한 것입니다. 해외 24개 교회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10여명 정기적인 모임이 있는 곳이 6곳 정도이며 나머지 7곳 한두 사람의 연락처가 있는 정도입니다. 40년 사역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교단도 큰 교회도 아닌 일개 교회의 자연스런 성장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변 교회에 경계심을 일으킬 만큼 전도를 한 적도 없습니다. 현재 있는 대구 가창에 교회가 자리 잡은 후, 특별히 주변 교회들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지역 전도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130년 역사와 천만 신도를 가진 한국교회가 이런 일개 교회를 문제 삼고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지나치게 경직되는 길로 가고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우리의 입장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지키고 복음 위에 교회를 건축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좁은 판단의 기준을 가지게 되면, 교회는 거꾸로 경직되고 생명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흘러 들어올 수 없게 닫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대구교회와 이현래 목사님의 사역은 교회의 다양성의 관점에서 가치를 재평가해야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함과 같이(고전12:12), 교회는 한 몸의 정체성을 지키고 많은 지체의 다양성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도 내가 가진 판단의 기준을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것이라 말할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이단으로 정죄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중해야 할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많은 지금 시대에, 대구교회처럼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교회개혁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자는 교인들을 틀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영적 양식을 먹을 수 있게 하고, 교인들은 늘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려는 인도자를 신뢰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관계는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에게 본이 되어야할 모습입니다.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인 헌금으로만 교회를 운영하고, 일방적인 설교가 아니라 누구라도 자유롭게 간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예배 형태, 교회 구석구석에서 삶의 변화를 간증하는 이런 모습은 많은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귀중한 측면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신 바울의 고백처럼, 주께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온전케 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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