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 2부] 2. 성육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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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8-14 11:21 조회7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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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 2부 :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됨]


2.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제자들의 고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고후5:19). 이것을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에 근거하여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요14:9).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서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전파했으며, 그것이 우리 삶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을 가지는 것입니까?

 

가. 새로운 약속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생명과 본성을 공급하여 땅 위의 사람을 하나님 일의 동역자와 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생명나무 대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져오게 되고 ‘땅 위에서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위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부분에 대해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마음과 형상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부르신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안식일과 제사와 성전 등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열악한 한 민족의 흥망성쇠와 선지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도록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 이르지 못하고 행위에 집중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지만 안식일을 선포하신 하나님 마음을 몰랐기에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꾸중을 듣게 되었습니다(히4:5). 제사를 드렸지만 제사의 정신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고 상한 마음을 원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시40:6, 51:17).


역사적이고 물질적이고 행위적인 구약의 계시 안에서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말씀을 지키면 이런 복을 주겠다.”는 쌍무 계약적인 율법에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일방적 은총의 새로운 약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1-33).”

 

새 언약, 곧 신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 속,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고후3:3).


제자들은 예수를 만난 후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로 해석되었고,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것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하나님의 약속들이 인격적인 것으로 해석되었고 인격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안식, 성전, 제물, 유월절……,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는 구약의 어떤 말씀을 비추어 보아도 그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나. 안식일의 주인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지키는 독특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안식을 범하는 자마다 반드시 죽이라고 하시며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지 참 안식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재해석하였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일을 쉬셨으므로 일을 쉬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실 때 일하는 것, 즉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이것은 사람을 종의 위치에서 주인과 아들의 위치로 바꾸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10).”라고 말씀했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이 아니라, 참 안식은 자기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전혀 이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즐거움이었으며,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일하고 하나님이 쉬실 때 쉬심으로 하나님과 한 호흡이 된 안식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다. 번제단의 어린양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해 수많은 양들이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만족에 이른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제물이 자신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해마다 제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히10:1). 그러나 예수는 제물 속에서 자신을 보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드려지는 자신의 운명을 보게 되었습니다(막10:45).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은 예수 자신이었으며, 그로 인해 다시 구약의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히10:5-9).

 

라. 육체로 된 성전

또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이며, 백성이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시절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하였던 것입니다(시137:1,4).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성전은 빼앗기고 파괴되었으며, 다시 재건했음에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요한이 증거했습니다(요2:19,21). 생명이 없는 돌은 아무리 아름다운 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자유하심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돌로 된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고 예수 안에 거처를 삼으셨다는 것이 사도들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인격으로 된 성전이었습니다.

 

마. 하나님 약속의 성취

구약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며(창3:15),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며(창22:17,18),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며 그곳은 대적이 발붙일 수 없는 곳이며(출3:8),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며(신28:6),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103:12)……, 등 수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은 이 약속의 성취를 얻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이고 물질적이며 문자적인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고후1:20). 사탄의 일을 멸할 여자의 후손도 예수이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될 씨도 예수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환경, 사탄이 침해하려 해도 침해할 수 없는 자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그 인격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기에 빛 앞에 어두움이 사라지듯 죄의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것에서 인격적인 것으로, 문자적 말씀에서 이면적 말씀으로, 역사적 사건에서 영원한 사건으로 성취되는 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의 육체 속에서 완전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우리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본성과 의향과 마음을 예수는 그 품속에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요1:18).

 

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곁에 있는 사람처럼 보게 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무엇인지를 재규정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음과 함께, 하나님 앞에 참 사람이 무엇인지 인간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었습니다(히1:3, 골1:15).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므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그가 모든 인간의 참된 원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사는 것이며(갈4:19), 그가 우리의 영원한 본이 되는 것입니다(벧전2:21).

 

바울은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3,18).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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