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점 28: 구속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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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종규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2-03 10:16 조회234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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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의 차이에 대하여 묻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쉽게 참조하는 라이프 성경 단어 사전(네이버 검색에서도 이 사전을 사용)에서 두 단어를 살펴보아도 구속(redemption)과 구원(salvation)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구속과 구원은 각기 다른 역사적 상황이나 시대적 맥락과 연관되어있다고 합니다. 구속하면 쉽게 떠올리는 것이 바로 유월절(逾越節, Passover) 사건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과 관련이 있고, 이집트에서 자신의 백성을 탈출 및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방책이 바로 어린 양의 피와 살 그리고 쓴 나물과 무교병으로 인한 구속(redemption) 사건입니다.

 

구속 혹은 구속하다(to redeem)는 말은 히브리어 파다(padah)나 가알(gaal)을 번역한 말이라고 합니다. padah는 보통 속전을 받고 풀어주다(to ransom)’구속하다’, ‘자유롭게 해주다’(to free)’구출하다(to rescue)’를 뜻하는 반면, gaal은 이 모든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친족으로 행동하다관계에 따라 의무를 다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앤터니 티슬턴에 의하면 이 단어들은 보통 어떤 구속자 같은 행위자로 인해 속박이나 위험에서 구원받아 자유나 안전, 새로운 삶을 누리거나 새 주인에게 속하는 상태로 가는 것을 가르킨다고 합니다. 그는 구속이 단지 속량(贖良)의 의미로 번역되어 이 행위가 마치 금전적인 지불로만 비유되는 것은 이미지나 은유를 너무 멀리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앤터니 티슬턴, 조직신학, 292쪽 참조)

 

구원(salvation) 역시 구속과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는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yasha와 명사 shalom은 각각 구원하다’, ‘억압에서 구해내다’, ‘평화와 번영을 제공하다라는 뜻과 구원’, ‘완전함’, ‘평화혹은 안녕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가장 저명한 구약학자인 폰 라트에 의하면 구약성경에서 샬롬(shalom)만큼 널리 사용하면서도 조밀한 종교적 내용으로 가득채울 수 있는 단어는 거의 없다고합니다. (전게서, 298쪽 참조)


 

내가 또 그들과 화평(shalom)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34:25)” “내가 그들과 화평(shalom)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37:26)”

 

여기서 이 샬롬이란 말은 하나님과 화평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 회복, 평화를 베푸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85:4-10)”

 

4대 문명의 발생지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 제국의 지배에서 힘없는 히브리인들이 그들을 불러내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 분의 대리자인 변화된 사람 모세에 의지하지 않고, 그들의 힘만으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압제적/환경적 세력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구속/해방/회복에 관하여 아주 정교한 밑그림이 이미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베드로전서히브리서의 기자(記者)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출애굽의 유월절 사건을 회상하면서 현재화하고 있습니다. 유대교라는 옛 종교적 배경과 로마제국이라는 세속적 환경에서 우선 그리스도라는 낙원 안으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구속 사건이 그리스도인이 된 그들이 목격하고 결국 동참하게 된 십자가 사건으로 현재화되어야 합니다.

 

이 역사적 회상은 곧 현재적 구속을 의미하며 동시에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통해 실낙원 즉 잃어버린 동산 에덴의 미래적 회복 즉 복락원의 새 모델인 새 예루살렘 성을 계시합니다. 예수 안으로의 구속이 철저하게 명료해져야만 평강의 왕이신 그 분이 통치하는 평화의 성인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의 구원이 분명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로 이 구속의 의미는 서서히 가려워지게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구속의 체험 없이, 즉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격적인 회심 즉 중생(거듭남)의 진정한 경험과 고백이 없이도 단지 기독교화 된 로마 제국 안에서 시민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유아 세례를 자동적으로 받아서 구속 및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현대로 하면 판(, 구조, 생명)을 바꾸지 않아도 구속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굳이 새 판으로 갈아탈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구속과 구원은 구대륙의 신학계에서는 속죄나 속량 나아가 대속의 의미로만 해석되고 이해됩니다. 아주 오랫동안 구속론은 아예 희미하게 속죄론으로만 대체되어 논의되었고, 구원론은 단지 성령론의 일부로만 여겨지게 된 사정이 바로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대영제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간 미국 청교도 신앙의 근본 주제도 구속과 구원이었습니다. 박해가 있는 곳에는 탈출이나 해방으로서 구속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지속적 번영과 안녕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구원으로 주제가 변경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속사 설교 시리즈로 유명한 18세기의 미국의 설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게도 구속과 구원의 구분은 불분명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다음 설교를 인용하여 보겠습니다. “구원 활동(the work of salvation)과 구속 사역(the Work of Redemption)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때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구속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자 구속주로 불립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구속사, 157)

 

구속에 기초한 구원을 주제로 삼는 (후일 한국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국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구속>은 희미하게 구속사적 사건의 희미한 중심으로만 여겨지고 만 것입니다. 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회복하려 했던 청교도들에게도 조차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 없는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이라는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을까요?

 

구속은 곧 성결(거룩)과 연결이 됩니다. 구속을 주제로 삼은 청교도가 건국한 미국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성결한, 거룩한 국가일까요? 아니면 아직도 현대 이스라엘일까요? 구속이 일차적으로 속죄와 같은 개념이라면 죄(원죄)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교부들과 현대 신학자들 나아가 소위 회복 교회에서는 원죄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과연 그들의 한계는 무엇이며, 목사님과 우리 교회는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요?

 

(다음에는 이 물음을 다루겠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각자 체험대로 다 아는 것이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고 길어서 죄송합니다....)

 

댓글목록

김성식님의 댓글

김성식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렇게  중요한 구속이 이렇게  희미하게 소홀이 다루어진 이유는  저의  소견은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인류  4대  성인이 당당히 되셨고
그 분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나
어떤 결단을 요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니 내가 죽고 끝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인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  없는  자랑스러운  십자가이니
구속이라는 절차 의미가 자연스레 불필요 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현래님의 댓글

이현래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불교는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다.
기독교는"나를 찾아 오신 하나님"이다

사람을 지으신 여호와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고
예수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셨는데

아담은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했고
예수는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하셨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 안에서 아담의 위치,즉 자기를 나무 뒤에 숨긴체
하나님을 피하고 있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운명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

누가 진실한가?
누가 참 인간인가?
누가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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