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 10.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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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원순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12 22:58 조회1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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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86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완전한 사회의 이상을 제시하는 대구교회 www.churchlife.net

 

[로마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

10.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

 

<로마서 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1절부터 11절까지는 읽은 것처럼 여러 가지 낯익은 단어들이 나온다. 화평이나 은혜, 영광, 사랑, 진노, 구원 등의 많은 말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를 이야기하려고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나를 위하고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취할 수 있는 자애로운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종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석가모니께서 성불했으면 성불한 것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우리도 그분처럼 되려면 그분처럼 해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노력을 통해서 성불을 하셨으므로 우리도 그 노력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 노력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난 하겠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사람은 못하겠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1등을 하는 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지 내가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1등하는 죽으심이 아니라 우리 운명을 대표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참여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 내가 있다. 내가 노력한 것이 아니다. 나는 노력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그분의 죽으심 안에 내 인생 전체가 폭로되고 내 인생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나는 아무 공로도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이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잇다. 1등 할 사람과 꼴등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 성철스님과 나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것 같다. 10년을 장자불와(長坐不臥)한다는 것은 우리 족보에는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노력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타고날 때부터 안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내 인생이 발견되는 것은 내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한 사실에 의거한 것이니까 실제에 의거한 것이니까 나만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 안에서 보면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다 죽은 사람이다. 다 피조물이다. 바로 안에서 볼 때는 뭔가 성을 쌓고 세상을 만드는 인간이 보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해보려고 모두 쫓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되겠다하고 쫓아가는 것이다. 가다 보면 바로 된 사람도 있고 안 된 사람도 있다. 가다 보면 하나만 되지 다 되겠는가. 왕은 한 사람만 되는 것이니까 밑에는 다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어쩌면 나와는 전혀 의논도 없이 나와는 아무 역사적인 관계가 없이 죽었다. 우리가 2000년 전의 예수를 아는가? 예수가 2000년 후의 나를 알겠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 안에 모든 인류의 죽음이 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 안에 모든 인류의 진실이 들어있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 거기에 들어있다. 거기서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는 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다. 노력을 많이 한 사람과 노력을 적게 한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과 안 좋은 사람의 차이이지 운명의 차이가 아니다.

노력의 세계에서 한 운명의 세계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꾸어 놓으셨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모든 세상은 전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네가 땀이 흘러야 먹고 산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노력을 해야 산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못산다. 노력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약육강식이다. 정의냐 사랑이냐는 뒤의 문제이고,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첫째이다. 역사는 항상 결과론적인 것이지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원인이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구열강들은 초창기에 아프리카나 미개한 대륙에서 사람을 끌어다가 노예를 삼아 자기들의 부를 축적했고, 그 땅에서 보물들을 가져다가 지금 소위 서구문명이라는 문명을 만들어 놓았다.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다 착취이다. 하지만 역사는 옛날에 착취를 했다는 것은 상관이 없어져 버린다. 그것을 보상해 줄 사람도 없고 보상해 줄 수도 없다. 지금 그 사람들은 부유해진 것이다. 지금 부유해져서 지금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고 지금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결과이지 전에 어찌했느냐가 전혀 상관이 없다. ? 이것은 노력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누가 노력하지 말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누가 너희들에게 잡혀오라고 했느냐, 너희가 잡혀 온 것은 너희가 못나서 잡혀온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거기에는 도덕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세상이 그렇다. 그것을 잘했니 잘못했니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고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네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살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1점의 오류도 있을 수가 없다. 노력한 만큼 능력이 있는 만큼 세상을 자기가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능력 있는 자가 바로가 되는 것이다. 왕이 되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참된 평화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UN이 모여서 평화에 대해 의논하고 안전보장이사회가 있지만 거기는 전부 자국의 이해관계이다. 자기 나라의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생각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나 아프간 문제라거나 이스라엘 문제를 의논할 때 자기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공자님이 뭐라고 하는지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지가 아무 소용이 없다. 거기에 문자를 쓴다는 것은 너무너무 우스운 일이다. 그것은 개를 보고 똥을 왜 아무 곳에나 싸느냐 하는 것이나 똑같다. 똥 사는 것은 자기 자유이고 태생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안다면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노력에 의해서 살아가는구나, 이것이 세상이구나를 알아야 된다. 내가 세상에 뒤지지 않으려면 노력을 해야 된다. 노력을 하지 않고 뒤져있으면서 불평하면 안 된다. 내가 노력을 안 해서 뒤졌으면 당연하게 생각을 해야지 내가 노력을 안 하는 동안 저 사람은 노력을 한 것이니까 내가 힘 안 쓰는 동안에 저 사람은 힘을 썼으니까 당연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살기도 편하다. 이것이 안 되면 세상 살기가 불편해진다.

우리는 세상은 세상대로 알아야 되겠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대로 알아야 된다. 이것이 혼돈되어 있으면 안 된다. 교회와 세상이 혼돈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은 교회가 왜 이래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세상이 왜 이래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인 중에 세상은 왜 이래하고 바라보고 뛰어든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사회복음주의라고 말한다. 불의한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기독교인들이 양심을 가지고 뛰어든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가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구속은 노력의 세계가 아니고, 은혜의 세계이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 내가 폭로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이다. 내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서 내가 죽을 사람으로 안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내가 숨이 코에 붙었고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지어진 존재니까 거기서는 정말 존귀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데에서는 흙만도 못한 존재로 폭로된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10년을 노력한다 해서 알겠으며 평생을 노력한다 해서 알겠는가? 우리도 속리산을 다녀왔지만 속세를 떠나서 가족을 버리고 단 것도 안 먹고 신 것도 안 먹고 좋은 것은 하나도 안 하고 궂은 일만 골라하면서 수양을 하겠다고 평생을 한다. 일부러 고생을 한다. 일부러 편안하지 않게 살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발견되는가? 그렇게 해도 자기 자신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와서 다른 사람과 살면 잘 살아지겠는가? 절대로 잘 살아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못 산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단지 남의 죽음에서 발견이 되었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되었다. ? 그분이 우리 인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운명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구속되었다. 구속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돈 주고 팔려간 것은 아니지만 종노릇한 것이니까 세상의 사탄에게 속아서 팔려 간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본적지인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래 거기에 놓아둔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는 왕자이지만 왕자라는 것을 잊어먹고 노예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내 진실이 발견된 것이다. 진실이 발견되고 보니까 내가 거기에 살 사람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해야 될 사람으로 발견된 것이다. 거기서 내 위치가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던 위치에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으로 위치가 바꾸어진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팔려 간 사람을 돈을 주고 다시 사 왔다, 원 주인이 다시 찾아왔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대가로 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그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구속된 것이다. 그의 죽으심을 모르면 우리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다. 아무리 기도하고 별 짓을 다해도 내가 그의 죽으심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서 나올 수가 없다. 바로의 노예상태에서 나올 수가 없다. 그의 죽으심 안에서 발견되어야 내가 죽었구나해야 거기에서 나올 수가 있다.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도 한 마디 해야 된다. 누구와 살다가 세상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세계에 대해 나는 죽은 자라고 알면 할 말이 없는데 조금 살아있는 것 같아 거들게 된다. 남이 하는 것보다 내가 잘할 것 같다. 자기의 죽음이 발견이 안 되면 어떤 경우에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우리가 그 죽음이 발견될 때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나는 오직 사탄만을 위할 존재에 불과하구나해야만 거기에서 나올 수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400년 동안 바로의 치하에 있었는데 왜 그때까지 못 나오고 있었던가? 그것은 그들이 그런대로 살만했고 요셉이 있을 때는 잘 살았고 그 후에도 400년이니까 좋은 왕도 있었을 것이다. 잘 대해주는 왕도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학대하던 왕이다. 그때가 찼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라고 했다. 백성들이 잘 살 때는 그 소리가 안 들린다. 그런데 매일 벽돌을 찍어야 되고 궁지에 몰린 것이다. 국고성을 쌓기 위해 노예로 일해야 되고 여기서 그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약속한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약속들을 주었는데 그것이 때가 찼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구속을 받고 나온 것이다.

구속은 양이 대신 죽은 것을 통해서 바로에게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어서 내가 세상을 탈출해 나온 것과 똑같다. 양의 죽으심을 담보로 해서 양의 죽으심을 전제로 해서 이스라엘은 나왔다. 이것이 구속이다. 이것이 구속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우리는 그 죽으심 안에서 내 인생이 발견된다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죽은 자로 발견된 것이 뭐가 은혜인가하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죽은 자가 죽은 자로 발견되는 것은 은혜이다. 죽은 자가 산 자로 발견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이다. 나 같은 사람이 알리하고는 절대로 권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 은혜이다. 그런데 어찌되었는지 내가 몇 방 맞더라도 한 방을 잘 치면 급소를 한 번 때리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저주이다. 자기를 모르면 저주이다. 자기를 알면 은혜가 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례로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래 그런 사람인데 속아서 착각을 하고 살다보니 항상 알리와 권투를 하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터지면서 또 하고 얻어터지면 또 한다. 알리가 봐 주니까 안 죽지 안 그러면 죽는다. 황소를 떼려 눕히는 주먹이라고 한다. 안 죽을 만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세상이 안 죽을 만큼 우리를 가지고 논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저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된다는 것은 은혜이다. 그것이 참으로 은혜이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우리 사람의 기질이 의로워졌다는 말이 아니고 이제 제 정신이 돌아왔다, 제 위치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기질은 아직 안 됐지만 제 위치로 돌아왔으니 하나님께서 제 위치로 돌아온 사람을 의롭다한다는 말이다. 분명히 범죄했지만 우리가 잘못했다고 하면 더 이상 나무랄 수 없다.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1차적으로 의로운 것이다. 죄를 짓고 잘못했다고 하지 않으면 불의한 것이다. 자기가 잘못한 줄을 알고 회개하면 상대방은 그를 의로 옳다고 인정할 것이다. 계속 싸우는 이유는 한쪽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고 하면 끝나는데 잘못했다는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담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잘못했다는 말이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만 잘하면 세상을 형통하게 잘 살 수 있다. 우리 교회 젊은 형제들도 세상에 나가서 잘되니 잘못되니 할 필요가 없다. 직장상사가 뭐라고 하면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잘해보겠습니다하면 다 통과되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했다는 말을 못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잘못했다고 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조금 잘못하면 잘못했습니다하고 말하는 훈련을 해야 될 것 같다. 그래야만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쉽게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것을 안 해 놓은 사람은 죽으면 죽었지 그 말을 못 한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자한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은 더 그렇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선비의 기개 정신 때문에 혀를 깨물고 죽더라도 내가 할 말은 한다는 것이 한국 사람의 기개라고 생각한다. 힘 앞에서는 아무 영광도 없다. 일본의 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혀를 깨물고 죽는다고 그 사람들이 가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논개가 끌어안고 죽었다고 해서 일본 사람들이 가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힘 앞에서는 아무 능력이 없는데 나라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고 그것을 키워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잘못했다는 의식을 가르쳐놓았으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잘못했다고 했어야 하는데 절대로 잘못했다고 안 하려고 배웠으니까 잘못한 놈도 말을 안 하고 잘한 놈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 하니까 일본에 가서 정탐을 하고 온 두 사람이 다르게 보고를 했다. 꼭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 가운데 열 명은 우리는 메뚜기 같고 다 죽었다고 했고 두 명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했던 것처럼 일본에 갔던 밀사 둘이 완전히 다른 보고를 했고, 죽을 때까지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다. 잘못했다는 말이 절대로 없다. 그러니까 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 자신이 폭로되어서 우리 진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국가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우리 진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동북아에서 우리가 어떻게 중심 국가가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교통중심 국가는 될지는 모르지만 불가능하다. 중국으로 붙거나 미국으로 붙거나 어느 한쪽으로 붙어야 한다. 어디가 유리할지 모르므로 중국도 섭섭하지 않게 미국도 섭섭하지 않게 일본도 섭섭하지 않게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외교술에 능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잘못해 한쪽에서 미움을 받고 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 큰 놈에게 미움을 받아서 좋을 것이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피조물입니다’, ‘나는 인생입니다’, ‘나는 숨이 코에 붙은 존재입니다’, ‘내가 선악을 아무리 안다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내놓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우리가 다음에 또 잘못한다하더라도 우선 그 사람 태도는 의로운 태도이다. 영원히 그렇게 안 한다는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음에 그럴 줄을 하나님이 아시지만 너는 태도가 됐다는 것이다. 상사 앞에 와서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 상사는 다음에 잘못할 것을 훤히 다 알지만 잘못했다는 그 말을 의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무리 잘한 놈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 하면 미워진다. 절대로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 하는 사람 밑에서 일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언젠가 찍히고 만다. 나도 젊을 때는 잘못했다는 한 마디만 했으면 끝났을 것인데 죽어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못했다. 잘못을 안 했는데 왜 잘못했다고 하느냐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와서 잘못했다고 한 마디 하면 될 것 같다고 하는데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잘못했다고 해야 하냐고 잘못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잘못했다고 하느냐고 하여 4년 동안 싸운 것이다. 자기 인생이 고생이다. 하나님이 나를 다른 길로 불러내시지 않았으면 나는 평생 거기에서 그런 식으로 살다가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다. 어디에 가든지 그럴 것이다. 나보다 힘센 사람이 있는데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내가 아무리 옳으면 무엇 하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을 살아보면 풋내기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세상은 노력으로 사는 것이다. 힘으로 사는 것이다. 마지막에 결론적으로는 힘이 정의가 된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그의 죽으심 안에 발견된 세계로 지금 넘어왔다. 왜 우리가 교회로 오는가?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오는가? 그런 세계 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서는 비록 부득이 살기 위해서 같이 살지만 천국을 누릴 수가 없다. 거기서는 우리는 평화를 가질 수가 없다. 참된 인간다운 삶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의 살으심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고 말았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렸으면 참 옳기는 옳지만 진실은 진실이지만 소망이 없다. 그의 살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근거가 우리의 의롭다함의 근거는 되는 것이다. 보증이 되었다. 의롭다고 하셨지만 태도는 분명 의로워졌는데 만일 그분이 실패해 버렸다면 그것이 의로워도 효력을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분이 살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에 대한 보증이 되었다. 지금도 그분이 역력하게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담보가 되어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그뿐만 아니라 살아나셨다는 것이 담보가 되어있다. 이것이 의롭다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하셨는데 왜 이렇게 하였는가? 바울은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려고 그랬다고 말했다. 전혀 가망이 없는 사람을 보고 기어코 점수를 많이 받으라고 하는 것을 오히려 그 선생이 불의한 것이다. IQ가 두 자리밖에 안 되는 사람을 보고 수능시험에서 400점을 받아오라고 한 것은 IQ가 두 자리가 밖에 안 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400점을 받아오라는 사람이 더 미련한 사람이 된다.

인간이 대책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절망적인 상태라는 말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뜻인데, 그런 사람에게 계속 율법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불의해 진다는 뜻이다. 이 기회에 예수 죽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도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이 기회에 자기도 외로우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발견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기질이 어떠하든지 간에 능력이 어떠하든지 간에 성분이 아직 어떠하든지 간에 일단 그 대책 없는 인간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아는 상태를 담보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롭다할 근거가 생긴다. 그 정도면 된다. 어떤 사람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하고 싶은 조건이 없어서 용서를 못한다. 꼭 용서를 해야겠는데 잘못했다는 한 마디만 하면 되겠는데 기어코 잘못했다는 한 마디를 안 하여 가슴을 치는 것이다. 잘못한 놈을 그냥 용서하려고 하니까 명분이 안 선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 부모는 늘 용서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그냥 용서하면 불의해지고 질서가 안 생겨져지므로 어떻게든 명분을 잡아 용서를 해야 되는데 그 명분을 제시해주면 된다. 간단하게 제시해주면 된다. 상사가 용서할 마음이 있는데 명분을 주어야 용서하는 것이다.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명분을 안 주면 용서할 수가 없다.

예수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우실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또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을 외롭다하실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절묘한 대책인가! 예수 한 사람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문제도 해결해주고, 우리 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하나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가 없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그냥 무산시킬 수 없다. 누군가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할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계속 자기 속에 의로우신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발표할 수가 없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문제를 해결할 때가 있다. 하나님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이 된다. 자기 문제가 해결 안 되면 하나님 문제부터 해결해 주는 것이 더 잘하는 순서이다. 그쪽부터 풀어주면 저절로 풀어진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위에서 화가 끝나야 밑에 화가 없어지지 위에서 화가 잔뜩 나있는데 밑에서 아무리 잘해보아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 지혜를 하나님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문제를 풀어주고 하나님이 맺혀있지 않도록 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 인생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A.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이 있음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까 다음에는 우리가 화평을 누린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우리를 더 이상 진노하고 저주할 조건이 없어졌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더 이상 반항할 것이 없어졌다. 하나님께서 폭로해놓은 예수를 통해서 폭로해놓은 우리 인생의 진실 앞에서는 하나님도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할 수 없고 우리도 하나님을 더 이상 거역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화목이다. 화평의 길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원수된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되었던 인생이 하나님의 대적의 편이 되었다. 왜 원수가 되는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만 되었으면 거역하는 자이지만 이탈하는 동시에 원수의 편이 되어버린다. 국군이 월북하면 무엇이 되는가하면 인민군이 되고, 인민군이 월남하면 국군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 목적에서 이탈하면 즉시 대적의 편이 된다. 그래서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사사건건 하나님 일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그 세계에 있게 되니까 나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자가 되고 만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편이 그쪽 편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쪽 편에 있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간첩이 된다. 이중간첩이 되면 누가 죽이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무 정보 없이 왔다갔다는 못한다고 한다. 이중간첩이 되면 없애버리는데 어느 쪽이 없애버렸는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간첩 노릇은 못한다. 우리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간첩 노릇은 못한다. 언젠가 도태되고 만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면 곧 대적의 편이 되어 버린다. 대적의 편이 되면 그쪽 편을 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저절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 목적을 방해하는 자가 돼버린다. 이것이 비극이다. 원래는 하나님을 위할 자인데 반대로 하나님을 방해하는 자가 돼버렸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안에서 회개하고 돌아왔다. 나는 사탄의 종노릇할 자가 아니구나, 내 인생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돌아왔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화평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화평이 있는 곳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화평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미국과 우리 사이에 지금 화평이 없다. 화평이 없으면 줄 것도 안 주고 잘될 것도 안 되고 지금 FTA를 한다고 하는데 화평이 잘되어 있는 상태라면 회담도 화기애애하게 부드러울 것이다. 껄끄러운 상태에 있으니까 잘 안돌아 가는 것 같다.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 바둑을 두면 고수 마음대로 되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놓는다고 놓아도 항상 고수가 원하는 자리에 놓는다. 왜냐하면 고수가 그렇게 유도를 한다.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화평이 첫째 문제가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화평이 있으면 안 줄 것도 주고 모르는 것도 가르쳐준다. 시험장에 가서라도 선생과 좋은 관계가 되면 지나가면서 자 하나만 말해주어도 힌트가 되어 열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수도 있다. 모른 채하면서 한 마디하고 지나가면 머리 좋은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모든 것이 화평 중에 이루어진다. 화평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B. 은혜 안에 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서게 된다.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한다. 원수가 되었을 때는 어디에 섰는가? 우리는 진노 아래에 서 있었다. 원수 됨이 되어있을 때는 항상 진노 아래 서 있었다. 진노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화목되었기 때문에 어디에 서 있는가? 은혜 안에 서 있게 되었다. 화목된 자에게는 항상 주체자가 은혜롭게 생각을 한다. 그런데 원수가 되어있을 때는 무엇을 해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화목이 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다. 화목이 안 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

6.25때 포로가 많이 잡혀왔는데 거제도에 수용을 해놓았다. 여기서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로 갈라졌다. 미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이 포로 교환 협상을 할 때 처음에는 무더기로 교환을 하기로 했는데 포로는 포로끼리 교환을 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하면 반공 포로가 많아 큰일 날 것 같은 것이다. 그때 이승만 박사가 아무도 모르게 용단을 내려 헌병대장에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려 수용소를 열어버렸다. 그래서 반공 포로가 쏟아져 나오게 되어 미국에서 깜짝 놀라 덜레스(Dulles, John Foster) 장관이 항의하려고 한국까지 왔다. 미국이 협상 주역인데 왜 우리와 의논도 없이 포로수용소를 개방했느냐고 했더니 이승만 박사가 하는 말이 덜레스 장관이 교인인 것을 알고 내가 하나님과 깊이 교제를 하고 의논하고 한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덜레스 장관은 침례교 집사인데 하나님과 의논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어 그냥 되돌아갔다고 한다. 반공 포로를 석방한 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었다. 그런 역사가 없었다. 반공 포로들은 어디로 왔는가? 자유 안으로 왔다. 그리고 친공 포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북한으로 다시 갔다. 억압 안으로 갔다. 우리가 어디에 섰느냐에 따라서 자유 안에 설 수 있고, 억압 안에 설 수 있다.

우리가 화목 되었은즉 은혜 안에 서 있게 된다. 소나기 오는 곳에 있으면 소나기를 맞을 것이고, 눈이 오는 곳에 있으면 눈을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곳에 항상 서 있는 것이다. 거기에 서 있는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혜택을 누리게 된다. 위치 때문에 어떤 장소로 왔기 때문이다. 내가 얼굴이 많이 탔는데 바다에 많이 가서가 아니고 바다에 하루 가서 3시간 밖에 있지 않았는데 탔다. 왜냐하면 강렬한 태양 빛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탔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가? 내가 원수 됨이 없어졌으니까 나는 이제 그분의 은혜 안에 있게 되었다.

은혜라는 말은 높은 자의 대가없는 혜택을 의미한다. 희랍어에서는 카리스라는 말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희랍어에서는 이 뜻밖에 없어 쓰는 것 같다. 카리스, 카리스마는 외모나 말의 품위에서의 매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은 매력적인 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호감이 있다, 호의가 있다, 품위가 있다는 말로 카리스마라는 말을 쓴다. 희랍어로 은혜라는 말은 카리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혹은 '이라는 말을 쓰는데, 히브리어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은혜는 대가 없이 주는 혜택이다. 원수가 풀리니까 화목이 됐으니까 대가 없이 준다. ? 은혜 없는 세계라는 것은 대가 없는 세계이다. 아까 우리가 노력을 통해 한다는 말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다. 네가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라는 말은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려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무엇을 해도 꼭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려면 꼭 돈이 있어야 된다. 돈을 주지 않고 가지고 오면 도둑놈이 된다. 인생을 사는 것은 반드시 시장에 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야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을 알아야 된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가지려면 도둑놈이 된다.

은혜는 대가 없이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이 하나님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임마누엘의 장이 열렸다.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안에서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낸 것이 참 은혜이다.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베풀던 은혜가 오해될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 안에서 이것이 참 은혜임이 결정지어지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은혜라고 말할 때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이 은혜 안에 우리가 섬은 우리의 공력을 묻지 않는 네가 무엇을 했느냐 얼마나 실력이 있느냐를 묻지 않는 은총이다. 그 안에 우리고 서 있다. 십자가 안에 그 운명 안에 우리가 설 때는 땀을 얼마나 흘렸는가를 묻지 않는다. 아담 안에 있을 때는 땀방울이 몇 개냐가 중요하다. 땀방울을 열 개 흘릴 것을 흘려 얻었으면 괜찮지만 열 개 흘렸는데 20개를 얻었다면 불의하다.

임마누엘! 구속!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분의 행하심 때문에 그분의 행하심을 본 것밖에 없는데 우리는 위치가 바꾸어지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서 자기 위치를 바꾸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모를 때 그런 것이지 자기 정체를 알고 나서는 자기 위치를 바꾸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세상에 덤벙거리는 사람도 알고 보면 자기를 몰라서이다. 알면 그렇게 할 수가 도저히 없다. 돌팔이는 아무 약이나 쓸 수 있다.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아 철저한 사람은 저 약을 써보고 싶어도 못쓴다. 왜냐하면 너무나 철저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약을 먹고 사람이 살았다고 해도 안 믿는다. 그리고 절대로 그 약을 쓰지 않는 것이 전문가이다. 이 콩 하나를 먹고 이 사람이 살았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않는다. 방금 먹고 산 것을 보아도 의사들은 안 믿는다. 책에 없는 것이고 자기들이 오랫동안 실험하고 데이터를 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연이고 오비이락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이 이치가 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임마누엘! 구속! 그 은혜 안에서 우리가 산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저주 아래에 있을 때는 무엇을 해도 안 되고 잘해도 안 된다.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은 상사가 미워하기 시작하면 오만 것을 다 미워한다고 한다. 이것도 미워하고 저것도 미워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미워지기 시작하면 이것도 밉고 저것도 밉다. 돌아선 것도 밉고 앞으로 오는 것도 밉고 모든 것이 다 밉다. 찬물 가지고 오면 찬물 가지고 왔다고 밉고 더운물 가지고 오면 더운물 가지고 왔다고 밉다. ? 은혜 안에 있지 아니하고 율법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찬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찬물 가지고 왔는데 왜 그러냐고 해도 소용이 없다. 미우니까 그런 것이다.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 은혜 안에 있지 않고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관계를 개선시켜놓아야 찬물 가지고 오라고 할 때 더운물을 가지고 와도 따뜻해서 더 좋다고 하고, 더운물 가지고 오라고 할 때 찬물을 가지고 와도 여름이라 시원해서 더 좋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똑같다. 우리가 은혜 안에 서는 것! 이 원칙을 안다면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똑같다. 하나님만 그런 것이 아니다.

 

C.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함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표현될 때 영광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어떤 것인가? 특별히 우리를 통하여 나타날 영광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구름을 통해서 나타났다. 불꽃을 통해서 나타났다. 바람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제는 우리는 통해서 인격을 통해서 나타날 영광을 우리가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구름에서 나타날 영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바람에 나타날 영광도 지나가 버렸다. 그것은 우리와 직접 관계가 없다. 물론 박수는 칠 수 있다. 야구 보면서 박수 치는 것과 똑같다. 나는 야구를 못하지만 우리 편 선수가 잘 날리면 박수치는 것과 똑같다. 이번에 누구는 400타인지 500타를 했다고 하는 것을 보고 박수를 아무리 쳐보았자 나는 하나도 넣을 수가 없다. 부름에서 영광이 나타난 것을 보면 놀랍다고 해도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금강산 구경하듯이 구경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 은혜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인가?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 무엇을 기다리는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니까 우리를 통해 그분이 나타나겠구나를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은혜로 들어감을 얻었으니까 이제는 영광이 나타날 일밖에 없다. 간단하고 아주 쉽다. 그런데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있는데 무엇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바꾸어지고 있다. 5.16혁명이 났을 때 시골에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계속 하루 종일 혁명공략, 국가재건 최고의 의장 장도영하면서 하루 종일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바꾸어지고 있구나를 알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뒤집어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나님과 예수님 둘이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 우리는 지금 세상이 바꾸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구경만 잘하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영광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다. ? 은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관심과 그분의 초점과 그분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를 통해 나타나려고 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으니까 당연히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것이다.

 

1)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함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다. 영광이 나타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안다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환란이 오면 저주로 가버린다. 인내해 보았자 도로 저주였다. 연단을 받아보았자 도로 저주였다. 물이 저주의 물이니까 가보았자 그것밖에 안 나온다. 이제는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그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환란이 오든지 뭐가 오든지 간에 이것은 전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려는 것으로 징조가 된다.

영광이 나타난 경우에 그냥 환란 없이 그냥 나타난 경우는 드물다. 환란이 오는 데 그것이 이상하게 저주가 안 되고 환란 그 자체가 묘하게 한 바퀴 돌더니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왜 소망이 되는가? 조금이라도 영광이 비추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재수 없이 밑으로 빠져가는 것인데 이제는 이상하게 환란이 왔는데도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소망이 생겼다. 북풍아 불어라, 남풍아 불어라, 나의 동산에 불어라 하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썼는가? 예수님이 이러저러해서 우리가 폭로되고 우리가 믿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우리는 그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은혜 안에 들어감을 얻게 되었고 앞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면, 우리가 그런 사람 같으면 세상이 인정하겠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세상이 뭐라고 하겠는가? 별꼴 다 보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나 나나 다 똑같은데 예수가 어쩌고저쩌고 한다고 남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환란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고 한다. 옛날 같았으면 잘못해서 환란을 당하게 되는구나가 될 것이고 그러면 그렇지로 될 것인데 이제는 환란을 통해 경험을 해보니 환란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연단을 낳고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알아지니까 아무리 바깥에서 비난을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상태를 보고 비난하는 것이니까 내 모습을 보고 비난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무슨 소망이 있는가하면 이 내 모습 이대로가 아니고 나는 언젠가는 변화가 될 것이라는 소망을 막연하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환란을 통해 인내가 오고 인내를 통해 연단이 와서 점점점점 확신되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부끄럽지가 않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간증하는 사람을 보고 그럴듯한 사람이 나와서 간증을 하면 아멘이 되는데 그렇지 못한 별 것도 아닌 사람이 맨날 나와서 떠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부터 떠벌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구나 할 수가 없다. 내가 왜 가만히 보고 있는가하면 아무나 못하기 때문이다. 하라고 해도 못한다. 그만큼 자기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한다.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모르고 보면 그냥 하는 것 같지만 미쳤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겠는가. 이 더운 말에 뭐 할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현재의 상태 때문에 받은 무시를 당한다고 해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담대해 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처음 출발할 때 학생만 약 30명이 있었다. 10평 되는 방 안에 있었는데 말은 온 우주가 들썩거리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변화되어 예수 같은 사람이 된다든지 새 예루살렘이 된다든지 하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슬슬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가면서 웃기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조직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조직이 없어도 생명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들을 때는 우습게 생각된 것이다. 우스운 소리로 생각되는 것이다. 200만이 되는 대구 시민 속에 어느 한 구석에서 학생 30여명이 앉아서 이런 엄청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우습게 생각했다. 두고 보자고 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끄러운 사람들은 다 가버렸다. 60명 중에서 30명은 떨어지고 약 30명이 남았는데 그것을 부끄러워 한 사람들은 다 가버렸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만 지금까지 온 것이다. 무슨 이야기이든지 자기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 해놓고 봐야 된다. 그것은 제 정신으로 한 말이 아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우리가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했다. 모세와 엘리야의 말을 들먹거릴 자격이 되는가. 바닷가에서 어부 노릇하던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못 배운 그 사람이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살자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맞아죽을 일이다. 제 정신이 아니니까 초막 셋을 짓고 우리 여기에 살자는 말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말은 당장 사형을 받을 일이다. 그냥 할 말이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또 모르고 배신을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놓은 것이 그냥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날 그 사람이 바로 그 말의 실체가 된 사람이 되었다.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한 담대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이든지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마서 5장까지는 현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가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엇을 했는가가 문제가 된다. 현재 자기 상태를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려온다. 자기는 어쩌고 저쩌고를 생각하고 있고 자기 스케줄을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여기는 절대로 우리가 개입하지 못할 곳이다.

나를 창조하실 때 개입하지 못한 것처럼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데도 내가 개입하지 못한다. 그분이 만드신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개입할 수가 없다. 그냥 잠잠히 보아야 한다. 홍해 바다가 갈라질 때 잠잠히 서서 너희는 오늘날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단지 그런 일을 봐야 되는 것이지 홍해바다에 가서 물이 얼마나 짠지 얼마나 깊은지를 재고 있어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갈라질 수 있나하고 넓이를 잰다거나 하는 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잠잠히 봐야 된다. ? 그분이 창조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도 창조한 일이다. 교회도 새 창조에 속한 것이다. 교회 건축도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건축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 교회의 상태를 놓고 어떻게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겠는가? 새 예루살렘은 아무런 흠도 없는 완전한 사회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놓고 완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가 한 말을 알면 다 비웃는다. 그래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소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자기의 상태는 접어놓아야 한다.

 

a.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다. 그분의 행하신 일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그분이 이상한 방식으로 묘한 방식으로 나를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주시는가. 불의한 자리에서 내가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나를 불의한 자리에서 의로운 자리로 옮겨주시는가. 어떻게 바로의 치하에 있다가 광야로 나와서 여호와의 장막을 건축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는가. 이것을 볼 때 자기에게 사랑이 밀려올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된다.

죄인을 위한 죽음, 원수 됨을 해지하는 것, 화목케 하신 것은 전지전능자의 선택이다. 우리와 관계된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의 선택이다. 그분의 선택이 이렇게 완전하고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소망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행위와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 그분의 목적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 우리는 모르지만 그분은 자신의 표현을 위해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를 만들었다는 그분의 계획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지 내 상태를 보고 나는 손가락이 다섯 개가 있으니 소망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봐서는 아무 소망이 없다. 그런데 그분의 역사와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 자기의 어떤 것에 소망을 두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이런 가능성이 있고 작년보다 이만큼 나아졌다는 것에 소망을 두면 안 되고 그분의 절대적인 선택,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당신의 표현으로 나를 사용하려고 선택한 것, 이 선택이 나의 기업이 된다. 우리는 여전히 옛날과 같을 수도 있다. 별로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많이 변한 것 같다. 어떤 사람 앞에 가니까 많이 변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의 기업을 두면 안 된다. 그분의 선택에 우리의 기업을 두어야 된다.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기업이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그분의 죽으심이 결국 우리에게 기업이 된 것이다. 보증이 된 것이다. 죽으시고 사심이 보증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의 선택하심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을 붙잡아야 된다. 나의 어떠함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

 

b. 진노에서 구원을 얻은 것임으로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것임으로 우리는 환란이 와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셨고 화목을 얻게 하였은즉 진노에서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구원은 지금도 구원이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은 구속이다. 구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말이다. 궁극적인 목표인 건축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속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구속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다 보니까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천당을 생각한 것이다. 구속받고 어디로 가는가? 천당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구속을 받았으니까 천당을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죄의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천당에 간다는 것이 해답이다.

구속을 받았으니까 천당을 가는 것이 아니고 구속을 받았으니까 의롭다함을 얻고 화목이 되었고 진노하심에서 우리가 구원이 될 것이다. 원수 되었던 것에서 구원이 될 것이니까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될 것이다, 아군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적군이 아군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 편이 된다. 하나님 동력자가 된다. 하나님과 한 세계가 된다는 말이다. 전에는 원수되었기 때문에 진노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귀순용사가 되어 내 편이 되었다. 내 편이 되면 하나님 편이 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c.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구원 얻을 것임으로

지금까지 말한 것은 객관적인 구원이다.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루어놓으신 사건을 말했는데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구원 얻을 것임이라는 이 말은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의 성질, 우리의 자아, 우리의 죄, 우리의 천성,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그분의 형상을 본받는 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그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없어지게 된다. 그분이 좋으니까 내 형상은 없어지고 그분의 형상이 나타날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하얀 피부를 좋아하여, 백인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껍데기를 벗겨 하얗게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내가 좋아하던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데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체들과 함께 건축되기 위해서는 어디로부터 나와야 되는가? 개인주의로부터 나와야 된다. 우리는 출발할 때는 다 개인주의이다. 지체들과 건축을 하려고하니까 내 개인주의가 방해가 되는 것이다. 내 개인주의로부터 해방되어 나와야 된다. 그래야만 자유롭게 건축이 가능하다. 철근이 철근대로 자기 고집을 부리고 시멘트가 시멘트대로 자기 고집을 부리면 건축이 안 된다. 건축을 하려고 보니까 철근과 시멘트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둘이 연합을 해야 하므로 개인주의로부터 자기가 나와야 건축이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살으심) 안에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속의 모든 것을 바꾸실 것을 말한다. 그분의 생명으로 바꾸어질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규화목과 마찬가지이다. 나무는 썩어서 없어지고 규소가 들어가서 돌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사라지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침투하여 들어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건축을 하는 동안에 사라지고 그분의 성분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이것이다. 로마서는 이렇게 처음에는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말하지만 다음에는 그분의 은혜가 우리 생명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12장 이후에는 건축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건축이 안 된다. 그냥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만 가지고서는 건축이 안 된다.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이 들어와야 건축이 된다.

그 생명 안으로의 변화로 인하여 그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 생명의 누림이 건축으로 오게 된다. 이것이 최고의 누림이다.

이것이 어디서 왔는가? 환란과 인내와 연단이라는 과정을 통해 오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큰 환란도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도 환란이 있는데 누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환란이다. 그때 우리가 인내를 배우게 되고 그 인내하는 동안에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 변화 안에서 결국 소망이 온다. 조금 불편한 일이 온다고 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는 것이다. 불편하더라도 이것이 나를 연단하기 위해서 있는 것으로 알아져야 감수가 되고 변호가 된다. 교회 온 사람 중에 누가 원수지려고 온 사람이 있겠는가. 사실은 미워하는 사람도 그러려고 온 것이 아닌데 아담으로부터 받은 자기 본성 안에 다시 말하면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 때문에 세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에 오니까 부딪치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오다보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일부러 나를 미워하려고 대구교회에 온 사람도 없고 일부러 나를 갈구려고 대구교회에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절대로 나를 괴롭게 하려고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단지 옛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오다 보니까 거기서는 잘 나갔는데 거기서는 괜찮은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안 맞는 것이다. 산에 가서 좋은 것은 바다에 가면 안 맞고 바다에서 좋은 것은 산에 가면 안 맞는다. 세계가 바꾸어지면 자연히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안다. 환란은 어쩌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가는 길을 재촉해 준다. 우리가 그 환란을 통해서 세상과 자아와 그런 미묘한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까 화목이 안 되는 것이다. 전에는 고집이 똑똑한 것인 줄 알았는데 화목이 안 되니까 고집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차차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분의 생명 안으로 가는 것을 촉진해 준다.

자신 때문에 오는 환란도 있고 하나님 때문에 오는 환란도 있다. 자신 때문에 오는 환란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왜냐하면 인생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소망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란이 유익하다. 전도를 해보면 어려운 사람이 너무너무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환란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무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잘 살고 있는데 필요를 못 느끼고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특별히 더 그렇다. 새로운 것을 또 어렵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므로 골치가 아프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환란이 좀 있는 것이 낫다. 자신 때문에 오는 환란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 때문에 오는 환란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가는 길을 촉진시켜 준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환란이 오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내가 소화하기에 따라서 그것은 아주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2)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함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된다. 엎어져도 즐겁고 넘어져도 즐겁다는 말이 엎어지면 엎어진 대로 은혜가 있고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또 무슨 은혜가 있다. 누가 나를 밀쳐서 갔더니 수박 밭에 넘어졌다. 썩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나를 괴롭힌 것이 이상하게 나를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 나도 옛날에 사람들이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할까하고 생각했다. 왜 죄 없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가하고 생각했는데 뒤로 와서 보니까 그 환란이 내 인생에 얼마나 좋은 것이 되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는 거기에 있을 사람이다. 얼마 전에도 거기에 있는 사람과 1시간 동안 통화를 했는데 서로 싸우고 갈라져서 엉망진창이 되어있다. 거기에 있었으면 나도 당연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간증을 하니까 그 사람도 나에게 환란 속에서 뽑아내셨네요 하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 있었으면 중심에 있었을 것이고 자연히 휘말려 들어갔을 것인데 끄집어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나를 거기에서 끄집어냈다고 생각한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했듯이 거기에서 끄집어내었다. 하나님이 다른 계획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들어다놓았는데 와보니까 내가 왜 거기에서 그렇게 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평생 거기서 살 사람이다. 내 스스로 어디를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또 발로 차고 나오라고 하여 멀리도 가지 못하고 대구에 떨어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나를 튕겨내지 않았으면 나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환란을 주관한다고 할 수도 있고, 내가 잘못하는데 어째서 하나님은 그것을 더 좋은 것에 이용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전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내 잘못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자기 안의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가? 이것이 바로 그분과 화평을 누리면 그분의 은혜 안에 서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영역 안에 서있기 때문이다. 엎어지고 뒤집어져도 은혜 안에서 뒤집어지는 것이다. 잘된 집 며느리는 가지 밭에서는 애기를 밴다는 이야기가 있다. 잘되는 사람은 남이 안 될 줄 생각하는 것도 잘된다. 아슬아슬하게 안 될 것 같은데 잘 된다. 참 이상하다. 내가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이삭이 밀려다녔던 역사가 내 역사로 알아졌다. 이렇게 밀려다니는데 하나님이 점점 창대하게 했다. 내가 그렇게 밀려다닐 사람도 아니고 내가 뛰어다닐 사람도 아니다. 내 성격은 한 곳에 있으면 그냥 있지 내 스스로 옮겨 다니지 않는다. 남이 나를 옮겨서 옮기는 것이 내 스스로 옮겨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자꾸 그것을 축복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뒤에서 바꾸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만 있기만 하면 그 복은 화평을 누리고 그 대가로 은혜 안에만 있기만 하면 그 영역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이래도 복이 되고 저래도 복이 되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 소망으로 인해서 나는 즐거워한다. 한 번 그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걱정이 안 된다. 처음 젊었을 때 그런 일을 당하고 하나님이 나를 이쪽으로 옮기려고 그랬음을 알고 나니까 CCC에 있다가 나가라고 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그때는 소망밖에 없었다. 뭐 또 좋은 일이 있겠지로 생각되었다. 이것을 바울이 써놓은 것이다. 내 말을 써놓은 것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 대구에서 처음 시작할 때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 쥐고 학생들이라 돈 벌이도 못했다. 그때 돈 벌이를 한 사람은 서현배 자매와 박영호 형제 딱 두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소비자였다. 재승형제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새벽에 나가서 강의를 하여 같이 먹고 살았다. 요즘 건강이 좋아졌는데 그때는 감기를 잘했다. 새벽에 나간다는 것은 재승형제에게 상당히 무리한 일이었는데 학원이 새벽과 밤에 나가야 했다. 지금처럼 차도 없어 목도리를 두르고 버스를 타고 다녀 우리가 살게 되었다.

은혜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밀리고 밀려서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분의 그것을 믿은 것 하나밖에 없는데 아무것도 우리가 한 것이 없고 그렇습니다하고 시인한 것밖에 없는데 그분이 행하신 것이 옳구나, 당신이 행하신 일이 옳지 않으신 일이 없습니다, 오른편 강도가 했던 그 말처럼 우리는 단지 그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우리는 그분과 화평이 되고 화평이 되니까 은혜 안으로 옮겨지고 은혜 안으로 옮겨지니까 우리가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a.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연약할 때 기약대로! 이 기약대로라는 말은 아주 알맞게라는 뜻이다. 연약할 때 아주 알맞게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딱 알맞게 우리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

 

b.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고,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화목케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의롭다함의 결과는 너무너무 풍성하다. 그리고 이것이 입문이다. 시작이다. 이 관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속의 내면적인 풍성에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는 객관적인 수속이지만 이 수속이 없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 수속, 관문,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관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무궁한 그 비밀이 모두 우리 속으로 들어와서 어느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게 되는 그날이 오게 되면, 아니며 우리가 그렇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쫓아내려오게 될 것이다. ? 성분상으로 변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어떠함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분과 같이 하나가 될 때 그분으로 화해질 때 그때를 가리켜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한다. 새 창조라고 한다. 전적으로 전에 없었던 것이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지금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했을 때는 사람이 없었다. 풀도 없고 동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빛이 있으라고 시작하면서 사람이 만들어진 것까지가 이미 선택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르지만 빛이 있으라고 한 그 선택 자체 속에 이미 우리가 탄생할 것이 예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가 새 예루살렘을 가도록 선택되어 있고 우리는 이 관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가고 누리면서 가는 것이다. 공산주의처럼 허황한 약속이 아니다. 사기꾼들이 약속한 것은 허황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것이 어떻게 허황한 것이 되겠는가. 자기 정책의 목적을 위해서 수백만을 죽이고도 눈도 깜짝도 안 하는 사람들인데 무슨 약속이 되겠는가. 아무리 화려한 약속을 했다할지라도 그 약속을 한 사람 자체가 무자비한 사람들이다. 거기에서 어떻게 평화가 오겠는가. 스탈린 시대에 소련에 거주하던 소수민족들을 변두리고 모두 추방시켰다. 강제 이주시켰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약속이다. 약속은 누가 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증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우리의 보증이다. 승리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분이 우리의 보증이다. 이것도 못 믿으면 세상에 무엇을 믿겠는가? 스탈린을 믿는 사람들이 어찌 예수를 못 믿는지 모르겠다. 김일성을 믿으면서 왜 예수를 못 믿겠는가. 이것이 다 마귀에게 씌어서이다. 예수를 못 믿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예수를 못 믿는 사람은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를 몰라서 그럴 것이다. 몰라서이기 때문에 책임은 우리 책임이다. 세상보고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다 충분하게 전파를 하지 못해 몰라서 그런 것이다. 알면 김일성과 비교가 되겠는가, 스탈린과 비교가 되겠는가, 막스와 비교가 되겠는가, 모택동과 비교가 되겠는가.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분이 우리의 운명을 대표해서 우리의 운명이신 그분의 우리의 보증이다. 그분이 우리의 담보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일은 세상에 없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험한 세상에서 땀이 흘러야 먹고 사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리고 바로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주시고 당신의 은혜의 영역 안으로 옮겨주셔서 우리가 당신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되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하고, 소망 없는 저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담보로 해서 우리에게 확고한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영광은 기어코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되고 나타나야 할 이 일은 당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선택을 우리의 기업으로 가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 당신의 그 계획. 이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고무시켜 주는지, 우리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절망적인 인생에게 얼마나 소망을 주는지. 주님 우리 자신을 다 접고 당신이 보여주신 이 아름다운 약속을 우리가 굳게 믿게 되기를 원하고 이것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상과 갈라지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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