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Ⅷ. 룻의 순종 (6월 11일)

본문

. 룻의 순종 (3:3-18)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은 방법이 있고 사람의 순종(順從)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불순종할지라도 당신의 일을 다 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다리시는 분이고, 우리의 순종 없이는 당신의 일을 안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일하시지만 반드시 우리의 순종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순종케 한 후에 그 일을 이루지, 순종치 않는 데서는 이루지 않는다.

어떤 학파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한 나머지 사람의 협력은 전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고, 어떤 학파에서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둘은 사실상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불순종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상태 대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냐, 인간의 협력이냐 하고 갈라져서 논쟁할 일이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께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도 당신 일을 하신다고 했을 경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은 우리를 순종하지 않도록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

이 장에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순종하는 것과 보아스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두 가지 순종을 본다. 룻은 시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모든 것을 시행하였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사람이었다. 룻이 보아스에게 은혜 입기를 원했을 때 보아스는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먼저 묻고 그가 거절할 때 내가 너에게 책임을 이행하겠다.”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결국 이 두 가지 순종을 통해서 다윗의 계보가 생겼고, 더 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생겼다.

그리스도를 낳는 과정에서 이런 순종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법에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성취될 수 없다. 그것이 지연되거나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쓰실 수밖에 없다.

아담은 왜 실패했는가? 하나님께서 잘못 창조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된 아담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가 완전하게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표현하기에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안 됐는가? 불순종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과 사람이 해야 할 일이 구별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합당하도록 만드셨지만 사람의 순종까지 만든 것은 아니다. 순종은 사람에게 달렸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모든 조건과 자격을 구비했지만 그가 불순종함으로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자동차를 아무리 완전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운전을 잘못하면 그 자동차는 사고를 낸다. 아무리 잘 만든 자동차라도 바위에 들이받으면 안 깨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차가 불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고 잘못 만들었다고 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라 하더라도 바위에 들이받아서 안 깨질 차가 없다. 만일 바위에 들이받아도 안 깨지는 자동차를 만들었다면 그 자동차는 자동차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고가 안 날 수 있는 자동차는 없다. 아담은 자격과 조건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불순종 때문에 실패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준행(遵行)했다. 그래서 방주가 지어졌다. 방주를 지으라는 계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노아가 그것을 짓지 않았다면, 방주는 지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방주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여덟 식구가 구원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다 하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듣기가 쉽다. ‘내가 이렇게 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 나를 어떻게 해 주시겠지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그렇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겪어서라도 순종하도록 만들어서 사용하신다. 억지로 기계를 사용하듯이 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우리의 순종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일하신다. 순종 없이는 일하시지 않는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시행했다. 그는 방주를 짓기 전에 당대의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은 자라.” 라고 했다(6:8-9). 그렇지만 그가 거기서 방주를 지으라는 말을 듣고 짓지 않았다면 방주는 지어질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부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따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수 없다. 부르심을 받고 따랐기 때문에 조상이 됐다. 이삭은 분명히 새 생명의 예표로 탄생되었지만 그가 아버지께서 가자고 하는 모리아 산으로 가지 않았으면 새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 이삭을 낳을 때까지 그는 완전한 조건을 다 갖추었다. 아브라함은 100세까지 연단 받고, 모든 과정을 거쳐서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조건에 있어서 하나도 결함이 없도록 탄생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모리아 산에 부른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조건을 갖추었을지라도 사람의 협력이 없이는, 사람의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야곱도 그렇다. 야곱은 일생동안 연단을 받아서 마지막에 순종하는 사람이 됐다. 그는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뛰어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평생에 그리던 아들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쫓아갈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저녁에 단을 쌓고 여호와께 묻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달라졌는가? 젊었을 때의 그였다면 그것이 상상이나 되겠는가? 너무나 쉬운 일도 불순종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절박한 감정을 억누르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런 사람이 되었기에 그는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었고, 여러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할 수가 있었다.

모세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인도하라고 말했지만 모세가 끝까지 거절했다면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 나는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누가 내 말을 듣겠습니까?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0-13).”라고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따랐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사람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하나님 자신에게 영원한 계획과 목표가 있을지라도 이것이 이루어질 때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의 어떠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때문에 그 시간이 늦추어질 수도 있고 빨리 당겨질 수도 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라고 물었다(1:6). 만일 예수님께서 홀로 회복하시는 것 같으면 내가 내일 모레쯤 회복하마.”라고 하든지 “3년 후에 회복하마.”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밖에 모른다.”라고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모르시는가?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 그 시간은 늦어질 수도 있고 빨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다 그렇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계시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때 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사람들은 날짜를 계산하고, 이스라엘 달력을 계산하고, 때의 징조를 계산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준비되지 않고, 신부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신랑이 어떻게 오겠는가!

결혼식장에서 신랑이 먼저 입장한다. 그런데 나는 신랑이 입장하기 전에 신부가 준비가 다 됐는가를 물어 본다. 신부가 준비되지 않는 한 신랑은 들어올 수가 없다. (신부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신랑 혼자 단상에 서 있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예수님은 언제 오실 것인가? 그 나라는 언제 회복될 것인가? 그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달려 있다.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람의 어떠함과 관계가 된다. 하늘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하나님 스스로가 하신 일, 하나님 홀로 하신 일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계획을 세우거나 목표를 세우는 일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가 어떠할지라도 그는 영원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고 그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땅에서 그것이 성취될 때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때와 기한은 사실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버지 속에 있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고이렇게 말했지만 다음 구절에 보면 너희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6).”라고 했다. 증인이 된 다음에 주님께서 오신다. 구체적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된다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어떠함은 그 때를 당길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다.

그러면 순종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돼야 하는 것인가?

나오미는 룻에게 오늘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타작할 것이다.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 너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라고 가르쳐 줬다.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첫째 목욕하고라는 말이 있다. 목욕은 더러운 것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 더러운 것, 때는 왜 생기는 것인가? 외적으로는 세상의 먼지, 곧 밖에 나가서 묻은 먼지, 내적으로는 자신의 노폐물, 이것이 때가 된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이것을 가지고 갈 수 없다.

소위 말하는 구원과 결혼은 다르다. 구원받은 것이 곧 결혼은 아니다. “나는 몇 월 몇 일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데 이것과 결혼하는 것은 다르다. 구원은 무조건적이다. 우리에게 때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일방적으로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깨끗한 것을 보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온전한 것을 보고 용서하신 것도 아니다. 내 불쌍한 것을 보고 용서한 것이므로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다. ‘너는 깨끗하니까 구원한다. 너는 더러우니까 구원할 수 없다.’ 이런 법은 없다.

그러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 있는가? 같이 사는 것이다. 결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더러우면 같이 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더러우나 깨끗하나 전혀 문제가 안된다. 일방적인 자리니까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같이 살려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깨끗하면 우리도 깨끗해야 되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랑은 목욕을 해서 세상 먼지와 자신의 노폐물을 다 씻었는데 신부가 시커먼 때를 가지고 온다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는가. 탕자가 밖에서 돌아올 때 아버지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돼지우리에서 돼지 막을 쳤든지 돼지 똥이 아직도 묻어 있든지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 아버지는 전혀 관계치 않고 그를 얼싸 안고 맞아 들였다. 이것이 소위 구원이다. 그런데 그를 맞이한 다음에는 잔치에 앉기 위해서 목욕을 하게 했다. 잔치는 즐거운 곳이고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러운 차림 그대로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목욕을 해야 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묻었던 때를 다 씻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의 때는 씻어야 된다. 주님과 합할 때 우리는 때를 씻어야 한다. 때를 씻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백성이 안됐다는 말도 아니다. 죄 용서함을 받지 못했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그런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같이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를 씻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는 기름을 바르라는 말이 있다. 기름은 왜 바르는가?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로션은 피부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바른다. 로션도 일종의 기름이다. 어린아이나 젊은 사람은 피부가 윤택하므로 바를 필요가 없지만 나이가 들면 피부가 거칠거칠하고 윤기가 없어지므로 로션을 발라야 한다. 이렇게 기름은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바르는 것이다.

거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 우리가 거칠어서는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없다. 우리는 원래 거칠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거친 것이 없어지도록 기름을 발라야 된다.

또 기름은 향기를 내기 위해서 발랐었다. 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 그 사람에게서 나는 향취, 그것은 그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고 흠모하게 하는 것이다. 나쁜 냄새가 난다면 가까이 가기가 싫다. 나쁜 냄새가 나면 거기는 사람이 다 비켜간다. 좋은 냄새가 나면 가까이 가고 싶다. 사람에게서도 좋은 향내가 나면 자연히 가까이 가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서 향취가 나면 우리가 사람을 가깝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가깝게 할 수 있다. 윤택하고 향취가 나는 것은 악취 나고 거친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거칠고 악취가 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없다. 물론 사람과도 같이 거할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지 못하면 사람과도 같이 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택하고 향기로운 것으로 기름을 발라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과 왕이 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다. ‘기름 부음은 헬라어에서 크리스토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란 말이 나왔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윤택하고 향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윤택하고 향기로운 사람, 생명력이 넘치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왜 나쁜 냄새가 나는가? 나쁜 음식을 오래 먹어도 나쁜 냄새가 난다. 우리는 마늘을 많이 먹기 때문에 서양 사람이 우리 곁에 오면 마늘 냄새를 느낀다. 우리가 미국 사람들 곁에 가면 버터 냄새가 난다. 음식이 몸에 들어가서 체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채식을 하거나 좋은 것을 먹는 사람들은 몸에서도 신선한 냄새가 날 수 있다. 그러나 돼지기름이나 먹으면 돼지 냄새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영적으로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몸에서 나는 냄새가 결정된다. 좋지 않은 여건을 계속 마시고, 좋지 않은 말을 계속 듣고 산다면 그 사람에게서 그것이 풍긴다. 화장터에 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시체만 보므로 좋은 것이 풍길 리가 없다. 보는 것도 먹는 것이다. 그래서 본 대로 풍긴다. 깨끗한 것을 먹고 향기로운 것을 먹으면 몸에서 향기가 난다. 향기로운 그리스도를 맡고 먹으면 우리 몸과 인격에서 향기로운 인격이 나온다. 사향은 방향성이 강한데 그것을 먹으면 몸에서 향내가 난다고 한다. 한약을 많이 먹으면 그 사람에게서 한약 냄새가 난다. 향기로운 냄새, 그것은 향기로운 그리스도를 풍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사람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연애해서 결혼한 사람은 대부분 얼굴이 비슷하다. 자기 얼굴과 비슷한 사람과 결혼한다. 자기의 얼굴이 가장 친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다. 어린아이들도 자기와 다른 사람을 보면 무서워하고 자기와 똑같으면 좋아한다. 그리스도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왔을 때 자기와 비슷해야 결혼하지, 너무 다르면 결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름을 바르고 향기를 내야, 기름 흐르고 향기로우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다.

셋째로 의복을 갈아입고라고 하였다. 의복은 그 사람의 품행을 표현한다. 옷을 보면 그의 마음이 단정한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방황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에는 의복이 신분을 표현했었다. 원님, 양반, 서민의 옷이 다 달랐다. 여자들도 치마를 오른쪽으로 돌리느냐 왼쪽으로 돌리느냐에 따라서 신분이 달랐었다.

의복을 갈아입는다는 말은 우리의 신분을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구원은 받았지만, 신부가 되는 것은, 아내가 되는 것은 죄인으로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죄인을 데리고 살겠는가? 또 죄인이 어떻게 죄 없는 신랑을 모시고 살겠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구원을 받지만 결혼할 때는 함께 살 수 있는 의인이어야 한다. 주님이 의인이면 우리도 의인이어야 하고, 주님이 거룩하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남편이 거룩하면 아내도 거룩하고, 남편이 깨끗하면 아내도 깨끗해야 한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처음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기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다. 그래서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를 했다. 세수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고, 좋은 옷도 입지 않고 엎드려서 기도하다가 아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 뒤 자기 궁으로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해서 아기가 살았을 때는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더니 아기가 죽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털고 일어나 바르고 나와서 밥을 먹는가?”하였더니 다윗이 아기가 살았을 때는 혹시 살려 줄까 해서 내가 하나님께 엎드려 있었지만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엎드려 있겠느냐. 내가 밥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친근하였다. 그래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자기 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먹었다.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벧엘로 돌아오는 길에 숙곳에 머무르려고 했다. 결국은 딸 디나가 밖에 나가서 강간을 당하게 됐다. 이 일로 인해서 아들들이 그 지방 추장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는 충격을 받고 더 이상 거기서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마지막 결심을 하는 것이다.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처음으로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했다. 이방신상을 한번도버리라고 말 안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말하게 됐다. 이방신상은 외적으로 묻어온 때라고 할 수 있다. 신상을 버리는 것은 목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야곱은 아내들이 신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도 잘돼 보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들이 그렇게 해도 묵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단을 쌓으려고 하니 이방신상으로 단을 쌓을 수가 없었다. 밧단아람에서 20년 사는 동안 여호와께 단을 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단을 쌓으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있는 이방신상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모세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백성들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의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서 강림할 것임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과 나오미가 룻에게 지시하는 말이 같다. 룻은 남편으로 삼을 보아스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러 가는 것이고, 안식처를 찾아 가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와 결혼하러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가도록 준비를 시켰다.

이것은 순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할 때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 우리는 목욕을 해야겠구나. 기름을 발라야 되겠구나. 의복을 갈아입어야 되겠구나.’하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그분 자신의 성질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다. 여자로서 시집을 간다면 신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고 가야 할 것 아니겠는가? 신랑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 가야지 괜히 돈 많이 들여서 신랑이 싫어하는 것을 가져가면 신랑이 짜증이 날 것 아니겠는가? 신랑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인가를 알고 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여자이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원하는가 알고 간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자기 생각만 가지고 간다면 준비는 많이 했을지라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없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준비다. 에베소 5장에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라고 했다. 이것은 결국 목욕하고 기름 바르고 의복을 입는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와 자신에게 있는 때를 씻고, 하나님의 기름으로 윤택하게 하고 향기롭게 하면, 우리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세마포 옷을 갈아입고 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도 다같이 세마포 옷을 입었더라고 하였다.(19:11-14) 예수님이 세마포 옷을 입었을 때 우리도 세마포 옷을 입어야지, 나일론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된다. 주님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봐야 하고, 그의 성품이 어떤가를 알아야 하고, 그의 모습이 어떤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음으로 너는 아무 때나 가지 말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라고 했다. 가라고 한다고 해서 한창 주연이 베풀어지고 있는 때에 젊은 여자가 너풀거리고 돌아다니면 일을 망치는 것이다. 정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아주 지혜롭게 지시한 것 같다.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 눕는 곳을 알아 뒀다가 그 발치에 가서 이불을 가만히 들고 누우라는 것이다. 아주 지혜로운 생각이다. 추수한 뒤 타작의 잔치이니 즐거운 잔치일 것이다. 잔치가 끝나고 기분이 가장 좋을 때, 가장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때 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안식하실 때 사람이 축복받는다는 이치다(2:1,2).

창세기 2장에서 여호와께서 지으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매 안식하셨다. 안식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 주인이 안식한 후에 복을 줄 수 있지 그렇지 않은데 복을 줄 수는 없다. 주인이 자기 일을 마쳐야, 자기 소원이 완성되어야 축복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내 일도 못해서 바빠 허둥거리고 있는데 누가 와서 부탁을 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안 된다. 더 급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을 마치시매 안식하셨다고 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마쳤기 때문에 안식하셨다는 것이다. 보아스가 안식할 때 찾아가니 금방 해결됐다. 복을 주었다. 아주 지혜롭게 지시했다.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라고 했다. 룻은 은혜를 입으려는 입장이었고 자비를 받으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나오미가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할 것이다.”라고 하니 룻이 시모에게 내가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행()하리이다.”라고 했다.

이상의 모든 과정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갈 때, 한 신부로서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갈 때의 준비와 꼭 같다. 신약 성경에 열 처녀의 비유가 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는데,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신랑이 올 때에 기름이 없는 다섯 처녀는 탈락했다. 그 기름이 무엇인가? 혹자는 성령을 받아야 된다, 방언을 해야 된다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을 하지만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가는데 대하여는 이보다 더 자세한 하나님 말씀이 없다.

신약은 구약을 전제로 함축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신약은 간단하다. 그렇게 말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기름을 준비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룻기를 안 읽은 사람은 기름을 준비하라면 무슨 기름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기도원으로 가야 될지, 예배당으로 가야 될지, 천주교로 가야 될지, 장로교로 가야 될지 모른다. 시경이나 논어, 맹자가 어렵다. 문자대로 읽으면 어렵지 않은데 중국의 오랜 역사와 철학과 문학에서 나오는 모든 사건들을 글자 몇 자에 함축하였기 때문에 배경 지식이 없으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래서 어렵다. 신약도 이와 같다.

신약에서 기름을 준비했다고 하는 말을 구약을 전제하지 않고 보면 밤이라서 기름을 준비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을 대로 해석을 하게 된다. 이것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여 나온 것이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러 가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가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룻기에 있다.

룻이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행하리이다.” 하고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했다고 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했을 때 네가 현숙한 여자인 것을 내가 안다. 온 백성이 다 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네가 누구냐?”라고 물으니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이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고 하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어찌 내가 모른다 하겠는가. 보아스는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막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않았으니 너의 베풂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네가 젊은 남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 시집갈 데가 많이 있었을 것인데, 나를 찾아 왔구나.”라는 말이다. 보아스는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보아스가 바로 허락한 것이 아니다.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라고 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다. 아무리 옳은 일을 할 때라도, 아무리 좋은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그 법을 따라야만 복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날 보아스가 법대로 하지 않았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룻이 합법적인 아내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온 동네가 시끄럽게 된다. “보아스는 돈 좀 많다고 자기 멋대로 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세력이 많다고 자기 멋대로 했다.”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온갖 송사가 다 있을 것 아닌가. 법대로 하지 않으면 뒤끝이 아주 시끄럽게 된다. 법을 따르면 조용하게 되는 것이다.

보아스는 자기보다 가까운 친족에게 묻고 난 후 그가 그것을 거절했을 때 자기의 의무를 이행했기 때문에 아무도 할말이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이것은 지극히 합법적이고 합당한 것이었다. 합당하지 않은 것은 들어올 수 없다. 모든 것이 합당하게 되어서 들어온다.

한 사람의 시모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다윗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윗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왕이 되려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서는 세상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는 입었지만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다. 왕이 되는 것은 다스리기 위함인데 다스리려면 이 법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을 통치하고 세상 앞에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권세를 드러내려면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순종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순종도 없고 합법적인 것도 없으면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해도 세상 앞에 설 권세가 없고 다스릴 힘이 없다.

이 계보는 왕을 낳기 위한 계보다. 룻기는 다윗이 어떻게 나왔는지 다윗 왕의 계보를 얘기하기 위해서 있다. 이 다음이 사무엘서다. 다윗 왕은 어떻게 나왔는가? 다윗 왕은 이렇게 순종과 합법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갖추었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공동 왕으로서 세상에 왕 노릇하려면 반드시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 과정을 겪지 않으면 은혜 입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라도,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될 수 없다. 즉 왕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를 왕이 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권세가 있으려면 우리의 삶이 합당해야만 한다.

우리가 합당한 삶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세상 사람이 당장 송사한다. “하나님 믿는 너나 그렇지 않은 나나 무엇이 다른가?’라고 한다. 교리주의자들은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래도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시고 나를 구원해 줬다.’라고 우겨댄다. 이건 어거지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누가 송사 하리요.”라는 말만 써 먹으려고 하기 쉽다. 내가 그렇게 우길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변호해 준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은 권세가 없고, 세상은 그렇게 변명하는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연산군을 왕으로 세워 놓았지만 그가 왕 같지 않기 때문에 백성이 따르지 않았다. 왕관을 쓰고, 옥새도 가지고 있지만 왕으로서의 권위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다.

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는가? 기독교인들의 자격이 하나님의 용서만 있지 자기들이 갖추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욕을 한다. 왜 욕을 하는가? 자기들보다 못해서 욕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보다는 좀 선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인데 조금은 낫겠지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교리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세상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그 구원의 문안에 들어올 때는 은혜만 필요하지만,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게 될 때는 권위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대신 해서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를 원한다.

룻의 역사는 왕의 계보이다. 구원받은 한 사람의 계보가 아니고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다윗 왕의 역사이므로 반드시 합법적인 것이어야 한다. 합법적인 혈통을 따라서 다윗 왕이 태어나게 되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자였지만 이런 완전한 과정을 거쳐서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었다. 왕의 할머니는 우리말로 하면 대왕대비다.

왕의 조상이 되려면 왕 같은 자격을 가져야 한다. 자격이 없으면 왕 같은 조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왕 같은 조상이 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왕이 나면 그 왕이 대접을 못 받는다. 우리 역사에서 합법적인 혈통을 따라서 왕이 되지 못하고 곁가지에서 들어온 왕은 계속해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쓰고 정치를 했다. 왕은 자기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다.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정복해야 할 사람으로서 우리의 조건이 꼭 필요하다. 이 조건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다 버린 바 되고, 다 죄 안에서 태어나서 죄를 밥먹듯 하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 편에서 날마다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시고, 쥐엄 열매를 먹고 있을 때도 기다리시고, 창기와 함께 재산을 탕진할 때도 기다리고 계셔서 우리를 문밖에서 영접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당신의 잔치 상에서 비단 옷을 입고 함께 잔치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으로 보내서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맞이하기를 원하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더 깊이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룻이 비록 모압 여자로서 이스라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합당한 과정을 거쳐서 다윗 왕의 조상이 되어 왕의 계보에 손색이 없는 한 사람으로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두가 다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기를 원하시고,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시기를 원하시며,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일을 위해서 준비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앞에 가서 부끄러움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세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룻기) Ⅷ. 룻의 순종 (6월 11일) > 화요말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