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Ⅸ.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룻의 보상 (6월 18일)

본문

.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룻의 보상 (4:1-22)

 

룻은 이삭을 주우러 갔다가 보아스라는 한 사람을 만났고, 이 사람이 자기의 기업 무를 자인 남편이 되었다. 모압에서 영원히 저주 아래 살던 한 여자가 하나님의 선택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들어와서 그는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쳤으며, 마지막으로는 안식처로서의 남편을 얻었다. 구원자로서의 남편, 자기의 기업 무를 자로서의 남편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신랑이 되신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로마서 73절과 4절에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다. 이것은 율법이라는 옛 남편에 대해서 죽임을 당한 우리 입장을 표현한 말이다.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죽임을 당했으니 다시는 율법에 대해서 의무가 없는, 남편이 죽은 여자와 같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마치 룻이 자기 옛 남편이 죽고 난 다음, 그 남편에 대한 의무가 없어지고 보아스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사건과 같다.

룻이 새 남편을 얻었을 때 성문에 앉은 장로들이 증거를 해 주었고, 축복을 했고, 하나님이 그를 축복했다. 옛 남편은 죽었는데 새 남편이 생겼으니 이 새 남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도 옛 남편이 죽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맞는 것이다.

우리의 옛 사람, 옛 남편, 옛것, 여기에 대해서 소망이 없어지고 그것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졌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는 죽은 자를 위해서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열매를 맺을 사람들이다. 옛 남편 말론의 아들을 낳아야 할 사람들인데 이제는 새 남편 보아스의 아들을 낳아야 할 사람들로 바뀌었다. 전에 아담의 아들을 낳아야 할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아들을 낳아야 할 사람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이 바뀌는 것은 단순히 남편만 바뀌는 것이 아니고 다른 남편의 아들을 낳는 것이다. 우리가 옛 남편을 떠나서 새로운 남편을 맞았으면 새로운 남편의 아들을 낳는 것이 의무이고 당연한 길이다. 새로운 남편을 얻고도 여전히 옛 남편의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옛 남편이 없어졌으면 새 남편을 따라서 새 남편의 아들을 낳는 것이다.

새 남편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를 낳는 것이다. 또 다시 죽을 자를 낳는 것이 아니다. 망할 자를 낳는 것이 아니다. 부활 생명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낳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옛날과 같은 것을예수를 통해서 생산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이를 만났으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산 것을 내놓아야 한다.

여자는 밭과 같은 운명이다. 전에 콩밭이었다 하더라도 팥을 심으면 팥밭이 된다. 자신에게는 씨가 없다. 콩도 없고 팥도 없다. 무슨 씨가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콩밭이 될 수도 있고 팥밭이 될 수도 있다. 옛 사람의 밭이었을 때는 옛 사람의 열매를 맺었고, 새 사람의 밭이었을 때는 새 사람의 열매를 맺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고, 믿는 자의 운명이다.

룻이 바로 이런 믿는 자의 운명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전에는 다른 사람의 아내였으니까 다른 사람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사람인데, 이제는 새로운 사람의 아내가 됐으니까 새로운 사람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이다.

룻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위한 것임이 증명됐다. 다 각기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왜 말론은 모압으로 갔던가? 또 모압에 가서 그 사람은 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던가? 그리고 룻은 왜 소망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왔던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추수할 때 왔으며, 또 이삭을 주울 때 보아스의 밭에 갔던가?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그때그때 이유가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귀결되는 결론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목적의 선()을 이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창조의 목적이 있었다. 창조한 그 자체로 끝내려는 것이 아니고 성육신이 되게 하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인격이 되게 하려고 창조했다. 단지 원숭이보다 좀 나은 동물을 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 어떤 길을 밟아서, 성육신한 사람,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과 사람이 합해진 한 인격이 되게 하려고 한 것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되었다는 것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다른 존재가 되게 했다는 말이다. 이와 꼭 같이 아담이라고 하는 창조된 사람 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서 그 사람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단지 책상이나 녹음기를 만들 듯이 피조물을 하나 만들어 두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 그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가 되어서 성육신한 사람, 하나님의 생명이 육체가 된 사람, 다시 말하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아담이 창조되었는데 이것을 방해한 것이 사탄이다. 사람은 사람대로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게 하려는 것이 사탄이다. 오늘날 종교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다. 사람은 사람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께 계속해서 절하고, 경배하고, 미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기도 드리고, 봉사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산 혼이 되게 하였듯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여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서, 육신이 된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 이것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다는 말이다. 이것으로 볼 때 하나님은 당신이 사람이 되시려고, 사람 안에서 사시려고 사람을 창조했다. 사람을 단지 고등동물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 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게 하려고 창조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려고 창조한 것도 물론 아니다. 당신 자신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사시려고 창조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는 뜻이다.

이렇게 가야 할 노선이 있는데 그 노선을 잘라 놓는 것이 사탄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고 사람을 속였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술 마시고 싸우는 부도덕한 일도 일어났지만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성육신을 향해 가는 그 길이 꺾인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다.

기독교가 2000년 동안 복음을 전해 오면서 이 사실이 명백하지 못했다. 영국에서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또 미국에서 무디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술집이 없어지고 극장이 없어지고 사회가 정화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서 이렇게 변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이렇게 큰일을 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술 먹던 사람이 술을 안 먹고, 극장 가던 사람이 극장에 안 가고, 싸움하던 사람이 싸움을 안 하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성육신이 되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 속에 다른 생명이 들어가서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사는 것과 나쁜 짓 안하고, 악한 짓 안하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다. 목적 자체가 다르고 길 자체가 다르다.

한때 그런 부흥운동이 일어나면 사회가 건전해지고 활발해지다가 한 시대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은 문화적인 유산뿐이다. ‘영국 사람들은 신사가 됐다, 문명 국가가 됐다.’는 식의 것이 남는다. 그 외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성육신이 안 된다. 성육신의 노선을 이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선해 진다고 하는 것과 사회가 좋아지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사는 것, 즉 성육신 하는 것이다. 그 목적 때문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것을 잘라 놓은 것이 바로 선악과다.

그래서 창세기 315절에서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했다. 여자의 후손, 여자로 이어지는 다른 자손이 나와서 너의 머리를 밟을 것이고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창세기 315절은 영원한 복음이다. 창조와 성육신 사이에 생긴 한 단절, 이 단절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 단절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어디로 가 버리고 병을 고치는 예수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 죄를 회개케 하는 예수님, 용서하시는 예수님만 남고 말았는가. 그런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은 성육신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인류 안에서 성육신이 일어나게 하시려고 왔다. 그런데 이것이 실종되고 다른 것만 남고 말았다. 그래서 이어져야 할 노선이 다시 단절되었다.

전기가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는 전선이 이어지냐 안 이어지냐 하는 문제이다. 등불을 켤 수도 있고 촛불을 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선을 이어서 전기가 들어오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경륜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을 써서 다른 것은 다 허락해도 전선만은 잇지 못하게 했다. 호롱불도 켜라, 촛불도 켜라, 램프도 켜라, 뭐든지 다 하라는 것이다. 단지 전선은 잇지 못하게 했다. 호롱불을 켜 놓는다고 영원히 켜지는가? 기름이 떨어지면 사그라질 것이다. 촛불이 영원히 켜지는가? 초가 닳으면 또 어두워진다. 역사가 그렇게 반복해 왔다. 어떤 경우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부흥 운동을 일으켜서 확 일어나지만 그것은 촛불 하나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사그라지면 그만이다.

창조는 시작이고 성육신은 완성이다. 성육신이 와야 그 다음에 교회가 된다. 교회는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 아니고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사회다. 새 예루살렘은 성육신으로 인한 사회인 것이다. 창조와 성육신, 창조와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온 것이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단절을 잇지 못하는 다른 일만 계속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기름을 가져와 등불을 만드는가? 어떻게 하면 초를 사다가 불을 켜는가? 이런 문제만 일삼게 된다.

창세기에서 룻기에 이르는 동안 어떻게 이 노선이 이어져 왔는가?, 몇몇 소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 노선이 이어져 왔다. 노아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또 모세를 통해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면면히 무엇인가 이어져 왔다.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계통이 무엇을 향하여 이어져 가는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향해서였다.

룻의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희귀했다. 모세가 지나가고 여호수아가 지나가고 사사들이 왔다. 사사들은 모세만도 못했고 여호수아만도 못했다. 그래서 점점 선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굵은 선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룻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 자기의 생각에 옳을 대로 했다. 그러니까 사사들마저도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가물가물하게 이어지다가 끊어졌다가 하는 그런 시대였다.

이 줄을 잇기 위해서 사람이 필요하게 되는데 바로 보아스와 룻의 출현이다. 이 두 사람의 위치는 아주 중요하다. 보아스는 이스라엘 사람, 선택된 백성이고, 룻은 모압 여자, 즉 근친상간으로 인해서 태어난 저주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이 만나서 한 쌍을 이루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신비롭고 놀라운,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했으니까 이스라엘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 하나와 완전한 이방 사람 하나가 만나 이 선을 이어가게 됐다.

이와 같은 것을 교회사에서 보면 초대교회는 바로 이방인과 유태인이 합해서 다른 한 세계의 교회를 이루었다. 유태인으로 충분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안 된다. 유태인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유태인을 선택했으니까 선택된 백성이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선택된 백성이 되지 않고 선택된 백성과 저주받았던 이방인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보아스와 룻도 같다. 이것은 사람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룻은 결국 모압 땅에서 다윗 왕의 성까지 그리고 임금의 성중에서 가장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들레헴까지 인도됐다. 룻이 가나안 땅에 왔다 하더라도 변방에 도착했다면 이 경륜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서울로 왔으니까 왕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제주도나 전라도에 가서 왕가에 가겠는가. 왕가에 시집가려면 서울 근처에서 머물러야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룻이 다윗 성 베들레헴까지 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도 변방에서 서성거려서는 안 된다. 서성이더라도 다윗 성 베들레헴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변방이 많이 있다. 변방에서는 베들레헴에 들어오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과 부딪혀야 한다. 우리가 성육신이라는 문제를 놓고 고통스러워 하든지, 방황하든지 해야 한다. ‘기도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 방언을 하느냐 못하느냐, 선교를 잘하냐 못하냐하는 이런 변방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면 애를 백 배나 더 써도 열매를 보지 못한다. 변방에서 아무리 잘 났어도 서울의 못난 사람만 못하다. 중심 개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변방에서 열심 있는 사람을 많이 본다. 변방에서 충성스러운 사람도 많고, 변방에서 훌륭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너무 변방에 있기 때문에 핵심부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은 성육신으로 가는 것이다. 성육신의 길에서 넘어지든지 자든지 해야 한다. 서울로 가는 차를 타고 거기서 술을 먹든지 자든지 해야 한다. 다른 데 가는 차를 타고는 아무리 정신차려도 소용이 없다. 술을 먹고 취했을지라도 서울 가는 차를 탔으면 좌우지간 깨 보면 서울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라고 아무리 알아 봤자 경륜의 핵심을 모르면 그것이 무엇에 소용되는 가치인지 모른다. 노아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많이 배웠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불렀는지, 그 사람의 일생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그런 길로 인도하는지, 이삭은 왜 모리아 산으로 꼭 가야 하는 것인지, 왜 야곱은 밧단아람에 가야 하는 것인지, 이 모든 이유가 어디 있는지 모르면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만다.

그런 상태에서 성경에서 많은 교훈을 찾아서 그 교훈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끝이 없다.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해야 하나님 말씀대로 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경륜의 핵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룻은 바로 경륜의 핵심 안으로 들어왔다. 다윗 성 베들레헴으로 들어왔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누가 나왔는가? 예수가 나지 않았는가. 룻이 들어온 그 땅에서 예수가 나왔다. 서울에서 있다가 왕도 되는 것이지 변방에 있다가는 될 수 없다.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는 한 정상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다. 다윗 성 베들레헴, 거기까지 룻이 인도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입장은 룻의 입장과 같다. 모압에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모압을 나와야 하는데, 남편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온다는 사실이 보통 일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주님을 따라 나설 때 남편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온 것 같이 그렇게 막막할 수가 있다. 구체적인 미래가 없다. 세상은 하루 나가서 벌면 100원 번다, 10,000원 번다는 것이 나오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나오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때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라고 했는데 그것은 지목이 없으므로 막연한 것이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순종은 얼마나 하면 되는 것인지, 믿음은 얼마나 가져야 되는 것인지, 하나님을 얼마나 알아야 되는 것인지 막막한 것이다. 그런 길을 가는 것이다. 모압은 그래도 구체성이 있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은 구체성이 없다. 애굽은 비록 벽돌공이라 할지라도 끓는 가마솥의 고기라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광야에 나가면 아무 것도 없다. 황량하다. 모압 여자가 남편 없는 시어머니를 따르는 길도 같은 길이었다. 막막한 길이었다. 가서 무엇을 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과 같은 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나안 땅에 도착했는데 가나안 땅의 어디로 도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갈릴리에 도착하는가, 베들레헴에 도착하는가.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했기 때문에 보아스를 만났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 흐르는 땅으로 와야 거기서 보아스를 만난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지만 그것이 우연이기보다는 베들레헴에 왔기에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다.

이 밭에서, 한 밭에서, 한 타작 마당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신성한 경륜의 목표가 있는 밭에서, 사람이 헤아리지 못했던 어떤 타작 마당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만났던 신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밭은 씨를 심어서 키우는 곳이고, 타작 마당은 거두는 곳이 아닌가. 결국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심고 거두어서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거두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도 그 생산적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이론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예수를 아는 것으로는 그리스도가 생산 되지 않는다. 생명으로 부딪쳐서, 결혼으로 부딪쳐서 새로운 것이 생산되는 데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보아스와 룻이 생산적인 밭에서, 추수하는 밭에서 만나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와 우리 사이의 생산적인 회합이 필요하다. 룻이 그 밭, 그 타작마당에서 기업을 얻었다. 주님과 하나되는 자리에 영원한 기업이 있다.

룻이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를 만나 아들을 낳게 된 이 사실이 우리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것과 꼭 같은 경로이다. 결혼을 통해서 모압의 한 과부, 남편이 없는 한 사람은 거룩한 시민이 됐다. 성민의 한 사람이 되게 됐다. 모압의 과부, 모압 사람이라는 그 자체도 저주고 과부라는 것 자체도 가난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거룩한 시민이 됐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모압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서 거룩한 시민이 되고 택함 받은 백성이 된다. “너희가 하늘의 권속이다, 너희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다라고 했다. 우리는 바로 그 권속이다.

룻은 구원의 주인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남편은 바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보아스는 모압 여자 한 사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해답이 되는 사람이었다. 모압 여자가 스스로 모압 땅에서 무슨 방법을 쓴다 할지라도 자신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열매를 맺을 사람으로 바뀔 방법은 없고 과부가 무슨 방법을 쓴다 하더라도 기업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자식없는 과부는 기업이 없다.

인생도 그리스도가 없다면 문제 투성이 속에 살게 된다. 이 문제 해결하면 저 문제가 생기고, 저 문제 해결하면 이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좀 정리 되겠지.’하는 생각이 들지만 정리 될 수가 없다. 빚진 사람이 여기 빼서 저기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데서 돈이 들어오지 않는 한 빚은 계속 있다. 인생을 해결하는 문제도 이리 메꾸고 저리 메꾸어도 빈자리는 똑같다.

이스라엘의 과부가 일생동안 발버둥쳐도 역시 과부이듯이 인생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정해진 길로 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도 허무하고 저렇게 살아도 허무하다. 잘사는 사람도 허무하고 못 사는 사람도 허무하다. 놀부는 잘먹고 살았고 흥부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을 자리에서 허무한 것은 한가지다. 아무 열매도 없는 것은 일반이다.

인생의 문제는 보아스 같은 남편, 영원한 남편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이리 맞추나 저리 맞추나 가난하긴 매 한가지다. 흥부집에는 이불은 하나밖에 없는데 아이들은 아홉 명이나 되니 이쪽에서 잡아당기면 저쪽이 안 덮히고 저쪽에서 잡아당기면 이쪽이 안 덮혔다. 열매 없는 인생의 모습이 그렇다. 룻의 형편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나오미와 룻, 두 과부가 바로 인생의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이불이 넓어지지 않는한 매일 저녁 똑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우리도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일 그 일을 반복했었다. 세모가 되면 철야를 하면서 종이 쪽지에 1년 동안의 어떤 것을 정리해서 태웠다. 새해에는 새롭게 신앙 생활도 하고 새롭게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엄숙히 맹세해 봤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의 면적이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안돼, 사람은 안돼라는 마지막 결론을 철칙처럼 얻어 왔던 것이다. 룻의 형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보아스를 만나고 나서는 완전하게 해결되었다. 이불이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다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다. 보아스가 부자인데 이불이 아홉 개만 있겠는가? 구백 개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불 한 개를 가지고 아홉 개로 만들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여야 해결되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한 개 가지고 안되면 두 개 가지면 되겠지. 두 개 가지고 안되면 세 개 가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넉넉해져야 된다.

나는 과거에 가난했을 때, 구석구석 가난했었다. 그리스도가 없었을 때 인생은 구석구석 가난한 것이었다. 이 구석도 가난하고 저 구석도 가난했다. 담배도 없고 성냥도 없는 사람이 성냥 있으면 담배하나 얻어 피울 텐데..’라고 한다. 성냥도 없고 담배도 없다는 것이다. 밥을 얻어 먹으려고 해도 그릇이 없다. 밥도 없고 그릇도 없는 것이다. 남편 없는 과부의 가난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주이신 풍부한 남편을 만나면 일괄적으로, 포괄적으로 해결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많은 것을 따져 왔다. 교회 생활, 종교 생활들을 하면서 많은 문제를 따져왔다. 어느 때는 기도가 없어서, 철야 기도가 없어서, 금식을 안 해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일일이 다 해결하려면 끝이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자 그 모든 것이 원인 무효가 되었다. 풍부하신 그리스도가 오니까 다 해결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인생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 정죄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방법을 찾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와 보니까 딴 세상이었다. 누군가에게 속아서 끝없는 늪 속에서, 꿈속에서 헤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 모든 것은 원인 무효 되었다. 옹색할 일이 없는 것을 옹색하게 생각하였고, 답답할 일이 없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했었다. 다툴 일이 없는 것을 다투었다. 모두 어둠이었다.

율법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 것만큼 안 되는 일도 많았다. 율법을 열 개 알면 열 가지를 못하게 됐고, 백 가지를 알면 백 가지를 못하게 되었다. 하다하다 안돼서 거기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른 남편이 와야 문제가 해결되지 그 남편 안에서는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 노력해 봐도 안 된다. 그런데 새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니 세계가 다르다.

유태인들은 안식일의 문제 하나만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연구를 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그날에 일하지 말라,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하지 말라, 이 말을 어떻게 지키면 완전하게 지키는 것인가 연구 한 끝에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에 대한 세부 조항, 조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이 이백 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율법 하나에 세칙이 그렇게 많으니 모든 율법의 세칙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많은 지킬 것들의 부채 속에서 우리는 결국 손들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는 그것을 위해서 애쓰고 섬길 자가 아니다. 오직 죽고 살아나신 자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산 자 안에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룻이 남편을 만난 것이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 죽고 다시 산 자를 만난 것, 이것이 인생의 해답이다. 이런 보아스를 만난 것, 이런 남편을 만난 것,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단지 우리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원한 목적인 성육신의 선을 잇기 위한 것이다. 보아스를 만났던 것이 단순히 남편을 만났던 것이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보아스를 만남으로써 그리스도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이 있다. 이 선을 연결하기 위해서 보아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룻은 어디를 가도 여자이다. 어디를 가도 아내일 수 있고 어디를 가도 밭일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구의 아내가 되며 누구의 씨를 받느냐 하느냐 하는 것이다. 씨가 문제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씨, 창조에서 성육신으로 가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에 있는 그 씨를 받아야 한다. 룻은 이 씨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씨를 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모압 땅에서 불러냈고 애굽 땅에서 불러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냈던 것도 성육신을 위한 것이다. 성막 자체는 성육신의 예표이다.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만든 그 집, 그리고 그 기물들 그것은 모두 성육신을 상징한 것이다. 성막을 짓기 위해 왔지만 성막은 어디로 연결되는가? 결국 성육신으로 이어진다. 성막은 완전하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이것을 짓기 위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냈다.

성막을 짓기 위해 이스라엘을 불러냈던 것처럼 하나님의 목적의 선을 잇기 위해서 모압 땅에서 룻을 불러냈다. 보아스와 만나게 하여 그리스도를 낳게 하려고 불러내었다. 그러므로 룻이 받은 보상, 곧 남편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선을 잇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모든 것이 해답이 됐다, 참 좋다이렇게 끝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오게 하기 위해서, 성육신의 아들을 생산하게 하기 위해서, 남편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위한 것이다. 경영의 목표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모든 것은 결혼에서 시작되고 결혼에서 완성된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결혼함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결혼함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된다. 천국의 모든 것이 생산된다. 흔히 천국이 따로 있어서 우리가 그곳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 안에서 천국이 생산되고 모든 것이 생산된다. 남녀가 결혼하면 아들과 딸이 태어나고, 가정, , 돈이 생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되는 그 속에서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생긴다. 왜 그렇게 방황했던가, 왜 그렇게 가난했던가, 왜 그렇게 허우적거렸던가! 모든 문제는 그 안에서 다 사라진다.

예수를 한 남편으로 만나지 않으면 완전한 해답이 안 생긴다. 단지 경배의 대상으로, 기도의 대상으로 만나서는 영원히 해답이 안된다. 그때그때 구걸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하나 얻고, 다음에 또 기도를 해서 하나 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와 남편이 되어 하나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남편이 될 때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남편이 될 때 없는 것이 없이 다 있게 된다. 새 예루살렘성이 되는 것이다. 빛나는 성, 영광의 성, 등불이 필요 없는 성, 밤이 없는 성, 굶주림과 목마름이 없는 성이 바로 이것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길 오라 하는도다, 값없이 와서 목마른 자들은 생명수를 받으라라고 한 것은 둘이 하나가 되니 생명수가 흐르더라는 말이다. 목마름이 다시 없고 배고픔이 다시 없다는 것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모압에서 저주받고 버림받았던 한 여자를 베들레헴의 왕이 있는 곳으로, 왕가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애굽 땅에 있었고 모압 땅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저주의 자식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애굽에서 바로의 국고성을 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해 내시고, 우리를 남편 없는 어머니를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으려고 우리를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가졌던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었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고 당신의 영원한 성육신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사실이 더욱 감사하고, 우리가 그 선상에서 그 선을 회복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더 영광스럽습니다. 우리를 이런 목적을 위한 거룩한 시민으로 그 백성이 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룻기) Ⅸ.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룻의 보상 (6월 18일) > 화요말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