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39] 39.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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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7. 14.(일)  말씀노트
(정한성 형제 )

 

에베소서 39.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

 

[에베소서 2장 14절~ 18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은 왜 창조되었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실체로 드러낼 수 있도록 하려고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필요를 위해 여러 가지 종교를 만들게 되었다. 여기에서 분열이 나오게 되었다. 십자가는 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끝내고 소멸하는 역할을 했다. 십자가 앞에 가면 우리는 모두 다 벌거벗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창조한 그 사람으로 밖에는 남지 않는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없이 끝났듯이 모든 인류도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없이 끝난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의 운명이다. 예수 한 사람을 보면서 우리의 운명을 발견하면 아주 쉬운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발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대책을 세워놓으신 것이다.

 

십자가를 모르면 예수를 알 수 없다. 십자가를 알면 예수처럼 쉬운 사람이 없다. 예수를 잘 모르겠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가장 가깝게 따라 다녔으면서도 마지막에는 “나는 결단코 모르겠다”고 했다. 이것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 안에 있는 운명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 사람을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운명’을 모른다는 뜻이다.

 

십자가를 알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를 알게 된다. 자기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으면 이것을 알 수 없다. 성경을 한 자도 몰라도 ‘나는 끝났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빈 그릇이구나!’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복잡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호랑이 보릿대 뒤집듯이 인생을 뒤적이다가 끝나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로 인해서 모든 것이 심판을 받는다. 그런 후에 다시 산 사람이 부활한 사람, 거듭난 사람이다. 이제는 자기의 목적이 없어졌고, 자기 계획이 없어졌고, 자기 인생도 없어졌다. 나는 죽었는데 영원히 귀중한 것이 생겼다. 이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

 

십자가가 객관적인 사건이라면 부활은 주관적인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거듭난 영(생명)이라고 할 때 우리 속 깊은 곳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스며들어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우리 영과 그의 영이 하나가 됐다’고 표현한다. 부활의 영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은 똑같은 사람인데 속에 무엇이 달라져버린 것이다.

 

이 체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근본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2:18). 이 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영이 됐기 때문에 그것을 ‘그 영’이라고 표현했다. ‘그 영’은 내 생명의 근본이 되었고 중심이 되었다.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위치상의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로서 유기적인 역할을 할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지체는 몸의 만족을 위해서, 몸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 그 자리에서 몸과 내가 화목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거듭난 영은 체험의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떤 것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과 내 생명, 하나님의 영과 내 영,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서로 섞여서 나누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말은 영이신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사람이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실체가 하나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분명히 보이는 사람들로서 교회지만 하나님과 내가 하나인 자리는 보이지 않는 자리이다. 눈으로 보이는 속에, 보이지 않는 나눔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가 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다르지 않는 하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 안에 들어올 때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을 우리가 서로 교통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영원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와서 아버지께로 간다.” 만물은 다 나온 자리로 되돌아간다. 어른에게서 나와서 다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숙은 영원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생명주는 영이 되어서 다시 오셨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우리는 맨 처음 나를 낳았던 그분에게로 돌아가서 나는 다시 아버지가 되어서 세상에 내려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 교회의 모든 형제들이 점진적으로 성숙해서 다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이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로 단체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다 엉망진창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는 자리에서 하나되게 하였다. 그리고 성막을 건축한 후에 그들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 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그냥 부름 받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내 신분이 변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우리는 한 백성이고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이 되었다.

 

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새로운 것을 공급받아서 자라나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활의 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영은 아버지께로 영원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있다.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하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와 내가 모양이 달라도 하나인 것을 발견해야 교회생활이 된다.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 안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형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 안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단지 육신이 있는 것은 영 안에서 하나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교회생활은 합창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한 영 안에서 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안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아버지와 일치하게 되고, 그때 우리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다시 아버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있을 때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고,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우리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겠다”고 하셨다. 우리도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에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어서 다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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