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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래 목사의 목양관
이현래 목사의 목양관은 “생명 목장에서의 방목(요10:9)”과 “양 무리의 본(벧전5:3)”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어떤 틀에 가두고 생명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들의 생각과 표현이 자유로워야 하며,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그가 성장하여 스스로 바뀔 때까지 생명 과 양식을 공급하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의 방법 아닌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인도자에게는 양들의 본이 되게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지게 됩니다. 목회자는 본을 보여야지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을 보게 되면 언젠가는 본 것이 삶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우리에 가두어서 인공 사료를 먹이는 곳이 아니라, 푸른 초장에서 자기 몸의 필요를 따라 풀을 뜯는 생명의 목장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어떤 제도나 율법으로 양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목양관입니다.
성경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에 완전하고 유일한 책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말로 주님을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한다 해도 성경만큼 온전하고 순결한 말이 없습니다.”(이현래 목사)
그러나 성경이 아무리 완전해도 이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되지만,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만큼 이해하고 장성하면 장성한 만큼 이해하게 됩니다(고전13:11).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떠함 만큼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모두’ ‘언제나’ 똑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과 해석이 나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혼자서 완전하게 이해했다든지 이것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고,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 있습니다.
교리
교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같은 길을 지나온 사람들의 체험을 지성으로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우리의 경험을 지나온 사람들의 고백(교리) 속에서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는 옳지만 그 자체가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이 빠진 교리는 몸의 각질과 오래된 화석처럼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고 정리하고 지켜온 교리들을 소중히 여기지만, 특별히 그것을 살아있는 체험으로 가지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
교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3, 행20:28).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배필인 여자를 만드셨듯이, 교회는 ‘십자가’, 곧 예수께서 ‘옆구리에서 흘린 피’로 조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식이나 이념, 교리나 제도로 건축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난 생명으로만 건축됩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택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흠 없는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라는 말씀처럼, 주의 몸인 교회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 되신 주님의 어떠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본성을 공급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게 합니다. 교회는 현재적으로는 주님의 몸이고,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두실 그의 형상으로서 인류의 최종적 소망입니다.
직분과 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각자 자신에게 주신 은혜와 생명의 분량만큼 해야 기쁨이 있고 수고로움과 다툼이 없게 됩니다. 생명이 성숙하면 그 성숙한 만큼의 일이 보이게 되고, 일이 보이는 사람이 그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교회는 인위적으로 직임을 임명하지 않고 생명의 분량만큼 스스로 일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돌로 만든 집에 거하실 수 없고,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으셔서 살아 있는 인격 속에 거처를 삼으셔야 했던 것처럼(행7:48), 인위적인 제도와 직분은 하나님의 자유하심과 생명의 유연함을 나타내기 어렵습니다. 오직 사람됨이 일의 방법이고 일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대구교회는 인위적인 조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배 형태
대구교회의 예배 형태는 오직 주 예수님이 우리 존재와 삶을 통해 나타나심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형식들이 사라지고 꼭 남을 것, 말씀 듣고 교통하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틀이 없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흘러가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예배가 되는 그런 형태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 작은 ‘순모임(소모임)’들을 통해 누구라도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만큼 이해와 경험을 나누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구도 소외됨이 없도록 교통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일은 특별한 사역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현황
대구교회는 학생들 몇 명이 모여서 성경 말씀을 듣다가 차차 사람이 많아져서 교회라고 이름하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청사진을 먼저 놓고 시작했던 것이 아닙니다. 또 틀이 정해진 교단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모양을 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양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그때그때마다 집회가 기대가 되고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면 간증이 어떻게 흐를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대에 차 있게 됩니다. 이현래 목사님은 늘 “주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 하시는 일을 지켜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위적으로 각본을 짜서 집회를 이끌어간다면 성령께서는 언제 일하시며, 생명은 어떻게 흐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는 한 사람이라도 말씀을 구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 말씀을 전하신 결과, 각처에 가족같이 친밀한 관계로 모인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해외나 먼 곳으로 이사 간 교회 형제자매들로 인해 각처에서 동일한 생명으로 교통하는 모임들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각처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을 그 지역의 이름을 붙여 ‘ㅇㅇ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